우리를 쓰게 만드는 것들
'고졸(古拙)하다'는 말을 알게 된 것은 추가 김정희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부터였다. 그의 작품평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표현이 바로 '고졸하다'는 것이었다.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다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를 안다고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잘 몰라도 끌리는 말도 있다. '고졸하다'는 말이 그랬다. 추사가 남긴 작품들을 보면서 비로소 그 말을 체감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그 일은 '고졸하다'는 말을 알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우리는 추사 김정희 하면 흔히 명필을 떠올리지만, 그 이전에 이미 학문의 대가였다. 붓으로 무엇을 써 내려갔을까. 아니 왜 붓을 들었을까. 공부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칠십 평생 벼루 10개를 밑창 내고 붓 1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추사 김정희의 고백은 유명하다. 어느 정도 해야 벼루가 붓이 그렇게 닳는 것일까. 그의 노력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까. 추사 연구자들은 '천재'라는 칭호를 아끼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그가 이룬 학문들이 전부다 연구되지 못했다고 전한다. 서예가들은 말한다. 아름다운 글씨는 지식이 갖추어진 이후에야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시서화(詩書畫) 삼절(三絶)'이라 하여 시, 글씨, 그림 이 세 가지가 재능을 모두 갖춘 이들을 숭상했다.
제주도에는 지금도 추사 적거지가 보존되어 있다. 돌담 넘어 단출한 초가지붕이 삐죽 솟은 집. 제주도 백성들이 사는 민가보다 초라했던 이 집에서 그는 말년을 보냈다. 왕가의 종친 집안으로 늘 풍족한 생활을 했던 날들은 먼 과거가 되었다. 조선 말기 극심했던 당파싸움에 휘말려 억울하게 쫓겨오게 된 제주도. 낯선 땅에서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풍토병에 시달리고 온갖 질병을 달고 살아도 그보다 더 고된 것은 시서화를 논할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 친구가 많던 추사에게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잘 나가던 시절 따르던 사람들은 끊어진다. 가시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낙담의 세월을 보내기에 모자람이 없는 조건들이었다.
기록을 보면 그는 꽤 까탈스러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왕가 친척 집안이었으니 웬만한 좋다는 것들을 겪어본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어느 한 분야에 매진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타협할 줄 모르는 주관과 예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호남 최고의 명필로 소문난 이가 추사에게 자신의 글씨를 선보인 일화가 있다. 교양 넘치는 여느 사대부들처럼 적당히 좋은 말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의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소만..." 삐딱한 조롱이었지만, 왠지 웃음이 났다. 심지어 그는 추사보다 열다섯 살 위인 노인이었다.
이렇게 까다로운 노인이 생전 처음 와본 유배지에서 그동안 이루었던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가 기댄 것은 책과 학문이었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읽고 또 썼다. 제자들을 키웠다. 읽고 싶은 책이 간절할 때 옛 제자 이상적이 손수 중국까지 가서 제주도를 거쳐 책을 보내온 감동은 <세한도>에 그대로 전해진다. 날이 매서워진 이후에야 소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렇다.
그는 분명 까다로운 사람이었지만, 고리타분하지는 않았다. 당시 사대부들이 배척하던 청나라의 학문, 북학에 마음을 열었다. 조선시대를 장악했던 주류 학파 성리학만 바라보지 않았다. 사람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만났다. 그런 진심이 신분이 전혀 다른 이상적과 같은 인연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스승을 위해 몇 달을 마다하지 않고 수레를 끌어 중국까지 찾아갔고, 남해의 험한 뱃길을 이겨가면서 전하고 싶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무것도 줄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 그 마음을 생각하며 붓 하나로 써 내려간 진심은 세기의 걸작으로 남았다.
역사가들은 추사체가 완성된 것은 제주도에서였다고 전한다. 만일 그가 순탄한 벼슬 생활을 계속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추사체는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며 세상에 내보내고 싶던 외침, 그 심경이 서체에 담겼다. 추사체는 특정한 필체가 없다. 추사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것이 추사체의 특징이다. 추사가 쓰면 그게 추사체다. 옛 법칙을 완전히 독파하고 나서 나타날 수 있는 새로움과 자유. 글씨를 모방할 수는 있어도 추사체가 될 수 없는 이유다. 글씨의 모양이 아니라 학문에서 우러나오는 멋, 그것이 추사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따금씩 힘들 때면 추사의 제주 시절을 떠올린다. 세상 좋다는 것은 다 누리던 사람이 그 모든 것들을 다 잃고 혼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벗들을 다 잃고 다시 돌아갈 기약도 없는 날들을 어떻게 견뎠을까? 추사 김정희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내내 그려지던 물음표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다가 하나의 작품이 말을 걸어왔다.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使我久坐: 작은 창문의 많은 빛이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있게 하네.'
한참을 그 문장을 들여다본다. 노년의 대가가 써 내려간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천진한 그림과도 같은 글씨체. 이를 관통하는 단순한 문장. 글씨 자체에 빛의 생기가 돈다. 몸은 갇혀있지만, 세상 어디에나 찾아오는 빛처럼 자유로운 마음. 초가집의 작은 창으로 들어오던 빛줄기를 떠올려본다. 그 빛에 이끌려 책상에 앉는다. 그거면 충분하다.
빛으로 빛으로 조금만 더 가까이.
쓰지 못할 백만 가지 이유들은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