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있지만, 하고 있지 않은

꿈보다 중요한 것

by 베리티

무슨 일을 하세요?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때로는 그 대답보다도 답을 하는 방식이 그 사람을 보여준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한다. 모임에서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과 무슨 얘기를 더 나누게 될지 결정된다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나서 답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인생의 무수한 날들 속에 매번 그러기도 쉽지는 않다.

영화 <프란시스 하>의 주인공, 뉴욕에 사는 무용수 연습생 프란시스는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제 직업이요? 설명하긴 힘들어요. 진짜 하고 싶은 일이긴 한데, 진짜로 하고 있진 않거든요.”

무용수라고 하기엔 어쩐지 허세 같고, 연습생이라고 하자니 멋쩍다. 무용을 하고 있기는 한데, 꼭 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지금을 드러내는 그만의 시도가 보여 그 사람이 궁금해진다.


내가 불리기 원하는 자리에서 나를 규정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내 일에서도 그렇다. ‘방송작가’라고 해도 그 일들은 천차만별이고 자신이 가고 싶은 자리가 있다. 대부분의 스타작가의 자리는 드라마 작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드라마 작가가 되는 일. 지금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하고 싶은 이들을 종종 만난다.


언젠가 동료 작가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모처럼의 독립을 축하하며 들른 그의 방 책상머리에는 다른 일들은 모두 드라마를 쓰기 위한 부업으로 여기고 즐겁게 일하자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목표가 있다는 건 좋은 거다. 밀렸던 수다를 한바탕 쏟아내고 나서 동네 호숫가를 산책할 때였다. “아까 내 책상에 붙어있는 글 봤죠?” 그저 힐끔 봤을 뿐인데, 그걸 알아채다니. 조금 놀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역시 그 얘기를 꺼내고 싶었던 걸까. “소설가 김중혁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방송이나 강의나 이런 모든 것들을 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한다고. 나도 그러려고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다 드라마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되겠더라고요.”

같은 이야기라도 나누는 사람들끼리의 맥락은 다르다. 우리가 나눠온 얘기 속에 일에 대한 시간이 쌓여있어서, 그 말은 다르게 들렸다. 드라마는 너무 하고 싶다는 '긍정'보다는 지금의 일은 진짜 내 일은 아니라는 강한 '부정'이 강했다. 하나의 열망이 다른 것들을 모두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내가 원하는 그 자리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하찮게 느껴지고, 더 심각해지면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다.


“좋죠.” 나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나에게 돈을 주는 그 일도 소중한 거예요. 너무 그러면 사람이 황폐해져요.” 그도 이내 뜻을 알아챈다. “맞아요.” 그리고 우리는 늘 하던 대로 책과 영화 얘기를 나누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의 주인공 료타는 한 때 수상작이 있는 소설가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후속작 없이 흥신소의 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세상의 주목을 받고 부모의 자랑이던 순간도 잠시, 도박중독에 불륜 사진을 찍고 다니는 '철들지 않은 아빠'라는 것이 그의 현실이다.

어느 날 베란다의 귤나무를 보며 그의 어머니는 말한다. “이 귤나무 기억하니?" 비리비리해 보이는 엉성한 나무에도 모자간의 세월이 숨을 쉰다.

"고등학교 때 네가 귤 씨 심은 거네. 꽃도 열매도 안 생기지만 너라고 생각하고 물 주고 있어.” 무심한 듯 팩트 폭격을 가하면서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어머니 키키 키린의 말투에 픽 웃음이 난다. 내 몸에 난 상처를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아들 료타도 지지 않는다. “말씀 얄밉게 하시네 ‘”

어머니는 위대하다. “그래도 애벌레가 이 잎을 먹고 자랐단다. 어쨌든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고 있어”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중에서

열매는 없지만 애벌레에게는 먹이가 되는 귤나무. 코믹하면서도 씁쓸한 비유다. 소설가가 되지 못한다면 료타는 잘못 살아온 것일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우리에게 묻는다.


그의 책에는 이런 대화가 있다. “저는 사실 그다지 의미라는 형태로 삶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 이면에서 의미 있는 죽음, 의미 없는 죽음이라는 사고방식이 나올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고레에다의 말에 공감하는 의견이 덧붙는다.

“원래는 의미를 묻기 전에 기분 좋게 살았다는 실감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나 친구, 주위의 자연과 접하며 생기 넘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의미를 말해야 하죠. 태어났을 때부터 무언가를 위해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출세하기 위해-살면, 사춘기가 되어 사는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 곧장 그 생각이 뒤집혀 훌륭하게 죽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기분 좋게 살았다는 실감. 주변 사물들과의 생기 있게 교류하려는 태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한 마디로 그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그의 영화들은 이를 위해 달려간다.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발견한다.'


의미 없어도 풍성한 삶. 그런데, 이미 풍성한 삶이라면 의미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의미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것. 의미를 찾다가 더 중요한 것을 잃을 수도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창작한다는 일은 의미에 치우치기 쉽다. 사실, 일 얘기만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하든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의미를 두는 그것에 다가가지 못하면 그 모든 것들이 가치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건 어떤 면에서 병적이다. 나에게 다가오는 신호들을 바라보지 못한다, 보려는 것에 눈을 크게 뜨고 그게 아닌 것들에는 눈을 감는다. 하지만 나와 연결된 주변의 일들을 돌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그다음에 어떤 의미가 찾아올 수 있을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놓치기 쉬운 무언가를 들여다보게 한다.


‘하고 있지만, 하고 있지 않은’ 상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우리가 모르고 있던 어떤 세계를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까.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는 고양이. 상자를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고전 물리학자들의 관념을 깨버린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하고 있지만, 하고 있지 않은’ 어떤 일은 성공 지상주의자들의 허울을 깨버리는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 역시도 ‘하고 있지만, 하고 있지 않은’ 어떤 것들이 있다. 동료 작가에게 했던 말은 사실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프란시스의 자기소개가 눈에 들어온 것 역시 그 때문이다. 그의 말속에 사람들과 얘기하고 싶은 생기, 그리고 자신의 현재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하고 있지만, 하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과 내 주변을 소중하게 여길 것. 그 이후에 '다음'이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