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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Mar 18. 2024

우연을 받아들이는 모험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

1. 만남과 우연


'나'라는 사람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중에서


데이빗 보위와 루 리드 사이에서 고민한 적이 있다. 70년대 팝음악계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 중에 누가 더 좋은가 하는 질문이었다. 아무도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쓸데없이 혼자 오래 생각하게 되는 그런 류의 문제였다. 근래 들어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났고 (살아있을 때도 이미 이 세상 텐션은 아니었다!) 전설로 남았다.

두 사람 사이의 일화를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데이빗 보위의 매니저가 두 사람의 저녁식사를 주선했다. 그날 보위는 언제나처럼 세련된 옷차림으로 나타났고 루 리드는 허름한 옷차림으로 나와 거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강한 전율이 통했고, 후에 함께 작업을 한 앨범이 < Transformer,1972>이고 우리가 잘 아는 곡 Perfect day도 담겨있다.


Lou reed -perfect day

 https://www.youtube.com/watch?v=9wxI4KK9ZYo


두 사람은 음악적 세계가 일치해서 만난 것은 아니었다.(글램록을 하는 보위와 뉴욕 펑크 씬의 루리드 음악은 다르다) 보위는 루 리드의 외로움과 우울함에 깊은 공감을 느꼈기에 만난 것이다. 루 리드의 그 이전 앨범은 상업적으로 실패했지만, 데이빗 보위가 프로듀싱한 이 앨범은 루 리드의 대표작이 되었다.

사람 사이의 일은 알 수 없다. 만났을 때 아무리 좋았어도 그저 추억으로 머물기도 하고, 또 어떤 만남은 여러 번 스치다가 한 번의 스파크로 영원히 남기도 한다. <만남이라는 모험>의 저자 샤를 페팽은 우정을 나눈 특별한 만남 가운데는 항상 우연이 가져다준 놀라운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2. 내가 알던 네가 아니어도


세기의 예술가들 사이에서만 그런 만남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작품으로 남아 오래 회자되기에 좋을 뿐, 알려지지 않은 우연들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 그중 어떤 우연은 잊을 수 없는 만남에 도달한다. 누가 발견해 낼 수 있을까. 그것을 언어로 펼쳐서 스크린에 옮기는 도전이 시작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8pr7rZV1f3w&t=29s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나츠코는 지하철 역에서 우연히 동창을 만난다. 반색하며 이어지는 대화들은 그의 집으로까지 계속된다. 근황과 안부를 가볍게 주고받던 두 사람, 진짜 중요한 얘기는 한 하고 있다며 던진 나즈코의 질문이 두 사람 사이 침묵을 불러온다. 지금 너는 행복하냐는 물음이다.

예의의 시간이 지나가고 진짜를 알고 싶은 질문이 일어나자 물처럼 흘러가던 대화들이 조금씩 삐걱거린다. 속을 털어놓자 예상치 못한 반전이 드러난다. 두 사람은 실망하고 당황도 하지만, 그대로 돌아서서 헤어지기보다 오히려 이 우연성에 상상을 더하기로 한다.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자신을 내어주는 모험을 감행한다. 진짜 이야기는 상대가 모르는 사람일 때 부담 없이 더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다. 나츠코는 학창 시절 자신의 아픔을 고백한다. 분명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일이다. 그리고 행복하냐는 물음에 상대방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나츠코가 듣지 못했던 말을 돌려준다. 상상이 모두 들어맞을 리가 없지만, 실망과 놀람 그리고 기대를 발견한다.

 

3. 꼭 필요했던 만큼의 고통이 없었어


나츠코는 학창 시절 좋아했던 친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서 알게 되는 것들이다. 너는 다른 사람이어도 되지만, 나는 네가 아니면 안 된다는 고백을 차마 못했다. 나와 함께 하면 네 인생이 복잡해질 수 있지만 그래도 날 선택하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사실 화가 났던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그때 그렇게 말하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 고통이 우리 인생에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


나츠코의 회한은 누군가를 좋아할 때 흔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지만, 무언가를 일깨운다. 문제가 없는 것을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바람직한가. 문제없음 문제없음 그리고 또 문제없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좋은 관계인가. 한 시절에 꼭 겪어야 하는 성장통을 피함으로써 더 자라지 못하는 아이에 머물러있지는 않은가. 고통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다음 단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꺾여버리는 줄도 모르고 평안하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때의 고통을 받아들였다면 인생에 어떤 구멍이 생겼을지 모르지만, 서로의 구멍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게 된 안타까움을 고백한다.


4. 남에게 관심 없는 세상에서의 기적


나츠코가 동창생을 마주친 것은 백 퍼센트 우연이었을까. 그가 겪은 상실로 인한 갈증이 다시 고향을 찾게 하고 누군가를 그립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처럼 인생의 구멍으로 연결되고 싶은 갈망 혹은, 그렇게 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화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여기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싶은 또 한 사람의 바람, 그리고 위로를 주고 싶은 배려로 빚어낸 상상이 모험을 벌인 끝에 특별한 만남을 창조했다. 그리고 나츠코가 만나고 싶었던 자신을 마주했다.

수많은 말들이 쏟아지지만 실은 남에게 관심 없는 세상에서 온전히 상대를 향하는 대화는 기적 같은 일이다. 우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상상력이 있다면 오늘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우연과 상상 Wheel of fortune and fantasy, 2021>은 왓차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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