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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Mar 21. 2024

특별했던 보통의 나날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


1. 우리들의 '걸후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The whole is more than the sum of its pars)
- 아리스토텔레스


손 편지를 주고받던 친구가 있었다. 컴퓨터가 있기 전, 편지는 모두 손편지였고, 손 편지를 나누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조금 달랐던 점을 찾자면, 우리는 편지지까지 손으로 만들어서 썼다. 그림인지 낙서인지 그리기를 좋아했던 우리들은 종이를 오려서 사인펜과 색연필로 좋아하는 그림들을 그려 넣었다.

손은 점점 바빠졌다. 편지지에 종이인형들, 게다가 편지봉투도 만들고 우표도 스탬프도 그려 넣었다. 배달도 직접 했다. 우리는 아파트 앞뒷동에 살았기 때문에 배란더에 서면 친구 집이 보였다. 시도 때도 없이 우편함을 들여다보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편지엔 시시콜콜한 초등학생들의 사건들이 오고 갔다. 대단한 내용이랄 것은 없었지만 그렇게 한 학기 정도 편지 쓰기와 배달에 매달렸던 우리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고 지금까지도 만난다.

커가면서 다른 친구들도 만났다. 우리에게 편지를 나누며 키득거렸던 시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 다투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고 실망도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5학년때 나누던 그 편지의 시간으로 기억된다. 우리가 지나온 세월 속에 서운하게 하고 다시 가까워지고 또 멀어지고 그런 모든 시간의 총합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생각한다.

소년시절을 설명하려면 지나온 모든 세월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소년이었던 메이슨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그를 그 자신으로 만든 '부분'들은 무엇이었을까.


2. 아이가 아이였을 때 모르던 것들

https://www.youtube.com/watch?v=UcBtVoodBGw

하늘 보며 공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메이슨의 시간은 엄마의 행보를 따라 흐른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학위 업그레이드에 매달리는 엄마와 얽매이지 않는 기질을 타고난 아빠의 사이는 간극은 커져가고 각자 새로운 배우자자를 만나게 된다. 새아빠의 아이들과 한 집에서 그럭저럭 지내고 주말이면 아빠와 시간을 보내는 일상.

의견은 묻지도 않고 머리를 자르고, 화장실에서 또래들에게 공격당하기도 하며, 무리들 사이에서 맥주를 마시며 허세에 지기 싫은 시간을 거쳐가며 천진했던 아이는 말수가 적어진 소년이 되어간다.


어른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도 없어 보인다. 엄마는 학위를 척척 따내고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강사지만 결혼에는 좀처럼 운이 따르지 않는다. 새아빠는 알고 보니 주정뱅이였고, 형편이 나아지는지도 잘 모르겠다. 크게 반항적인 소년은 아니지만 메이슨은 엄마에게 묻는다. 왜 그런 머저리와 결혼했냐고.

주말마다 찾아오는 새아빠는 밴드활동도 하고 뻔하지 않은 대화를 이끌어가는 재밌는 사람이지만, 생활력은 약하다. 하지만 메이슨은 삐걱거리는 부모님의 일상을 함께 하며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

 "어른이 된다고 크게 바뀌진 않을 것 같아. 엄마도 내가 헤매는 만큼 헤매고 있거든"


3. 뭐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충고하지 않기를 권하는 세상이지만, 때때로 잊지 못할 충고를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메이슨은 사진을 찍고 싶다. 수업을 빠지고 암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가자 선생님은 걱정한다.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만 무턱대고 칭찬하지 않는다. 그 재능 갖고는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한다. 노력과 성실함과 직업윤리 없이 그들 중 얼마나 성공할 것 같니.

"사진은 바보도 찍을 수 있어. 예술은 특별한 거야. 남들과 다른 걸 무엇을 보여줄 거니?"


아빠는 세상에 두 번 없을 생일선물을 준다. 비틀스의 화이트앨범이 아니고 '블랙 앨범'이다. 멤버들의 흩어진 노래들이 담긴 세상에 하나뿐인 음반. 아들의 졸업 축하파티에 보탤 현금을 깜빡하는 아빠지만, 여자친구 고민을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다.

"네가 책임져야 할 건 너야. 여친도 엄마도 나도 아닌 너. 네가 네 자신을 아끼면 여자들이 줄을 설 거다"


가족과 이별의 순간도 있다. 대학에 합격해서 기숙사로 떠나던 날, 엄마는 마냥 들떠있는 아들이 서운하다. 아이와 함께 했던 인생의 파노라마가 스쳐가는데 혼자만 슬픈 것인가. 결혼하고 애 낳고 이혼하고 어린 아들에게 자전거를 가르치던 추억부터 교수가 되고 애들을 대학 보내고 이제 남은 건 무엇일까. 장례식?

엄마는 눈물을 흘린다.

"난 뭐가 더 있을 줄 알았어 (I just thought there would be more)."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은 그걸 깨닫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관문에 들어가고 졸업하고 또 다른 관문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끊임없는 반복. 그 산봉우리에는 과연 그토록 바라던 무언가가 있을까. 결국 엄마와 같은 푸념을 하게 되는 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큰 인물이 되어야 성공을 해야만 좋은 인생이라는 것을 믿어야할까.


나를 내버려 두세요.
당신의 영웅이 되고 싶지도
대단한 남자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태격태격하길 바라요.
So Let me go.
I don't wanna be your hero.
I don't wanna be a big man.
I just wanna fight like everyone else.

-Hero 중에서, family of the year


4. 순간이 영원한 이유는


기숙사에 처음 들어가던 날, 메이슨은 룸메이트와 함께 어린 시절 가봤던 빅벤드로 하이킹을 간다. 노을빛으로 물든 풍경 속에서 오늘 처음 만난 친구가 말을 건넨다.


"흔히들 이런 말을 하지. 이 순간을 붙잡으라고. 난 그 말을 거꾸로 해야 될 것 같아. 이 순간이 우릴 붙잡는 거야(We don't seize the moment. The moment seizes us)."


대단한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순간의 소중함의 아는 사람이라면.

영원히 기억되는 순간의 가치를, 자신을 붙들어주는 지금을 기억한다면, 그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가 소소하게 보낸 보통의 날들이 특별했다는 것을.


Arcade Fire - Deep blue

https://www.youtube.com/watch?v=6yEN5gmdR8M


<보이후드 BoyHood, 2014>는 왓차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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