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
1. 그 눈에 담긴 우주의 불빛
몰입이 지나쳐서 살짝 미친 사람들이 있다. 프리즘으로 빛의 스펙트럼을 밝혀낸 뉴턴은 호기심이 지나쳐서 위험한 실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과학자들이 극단적으로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몰아붙인다. 뉴턴은 빛의 성질을 알아내려고 눈 뒤에 뜨개바늘을 넣어 망막의 굴절을 관찰했다.
행성의 궤도를 관찰하다가 망막 손상에 익숙해진 과학자도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히켄루퍼 박사다. 내로라하는 과학 수재들이 모인 그곳에서 그는 행성을 맨눈으로 관찰하지 말고 반드시 굴절상자를 쓰라고 경고한다.
"저는 열두 살부터 망막이 손상되기 시작했어요."
12살 아이 때부터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는 고백의 다른 말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저는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이쯤 되면 설레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끌린다. 망막이 손상되어도 더 가보고 싶은 길을 발견한 환희를 아는 사람들 말이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던가. 과학 수재인 우드로는 박사의 손상된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황홀한 찬사를 남긴다.
"우주의 불빛이 정말 눈에 녹아 있는 것 같아요."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망원경을 보던 우드로는 무심하게 내뱉는 다이나의 진심에 공감한다. "가끔은 우주가 더 내 집처럼 느껴져"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인생의 저울에서 어느 부분이 지나치게 기울어서 균형을 놓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1955년 운석이 떨어진 가상의 사막도시로 매년 '소행성의 날' 행사가 열린다. 이곳에 몰려든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외부에서 격리된 일상을 보내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연극이기도 하다.
2. 좀 알 것 같네요
이 도시의 사막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각자의 숙소가 있다. 마주 보고 있는 창이 하나의 프레임 같다. 종군사진가 오기와 코믹 배우 밋지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본다. 둘 다 자녀를 둔 부모이지만, 인생에서 아이가 1순위일 수는 없는 사람들이다.
'내 사진은 언제나 잘 나와'를 입에 달고 사는 오기도 코믹 연기를 하지만 멍든 눈 분장으로 알아주지 않는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 밋지도 머릿속엔 언제나 다음 스텝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있다. 허락을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어도 아무렇지도 않고 자식에게 철저하지 못한 부모라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죄의식은 없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눈물을 흘리지 않던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스스로를 직시하는 그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공주보다 뱀파이어로 불리길 더 좋아하는 꼬마 소녀들은 사막에 유골을 묻어 엄마의 장례를 추도한다. 시간 개념도 흐릿하고 고아의 뜻도 모른 채 두려워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상실을 극복하는 중이다. 소녀들의 할아버지는 아빠 오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엄마를 잃은 슬픔 앞에서 전에 없던 유대감을 경험한다.
이 연극의 연출가 슈버트 그린 역시 안락한 자신의 아파트보다 촬영장 가까이의 호텔이 더 편한 사람이다. 이렇게 그의 일상을 연극에 모두 바치고 있지만, 배우 밋지와는 어긋난 길을 걷고 있다.
이 도시를 호위하고 있는 군대의 총사령관은 시대를 이렇게 정의한다.
"편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이 시대에 태어나면 안 되죠."
3. 소행성 가까이 모인 밤
이 도시의 메인 행사라고 할 수 있는 운석이 떨어진 그 자리에 별을 관측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다. 밤하늘에 점처럼 보이던 불빛이 점점 커지더니 우주선이 된다. 그리고 외계인이 지구를 향해 착지한다.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그 역시 이제껏 본 적 없는 외계인 캐릭터인데 호리호리하고 단순한 용모를 선보이며 놀람을 주고 달아난다.
이 사건은 도시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다.
카우보이는 과학 수재들의 수업에 끼어들어 외계인의 지구 방문 목적이 반드시 침입은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냥 궁금해서 지구를 와봤을 수 있다. 지구인들은 그들의 모험심과 호기심을 왜 자꾸 외면하려 하는 것일까.
학생들은 각자의 외계인의 구상에 활력을 더해간다. 그중 누구는 노래를 만든다. 처음엔 좀 어설프게 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흥겨운 댄스무대를 만든다.
외계인에 대한 농담도 실감 난다.
"처음엔 외계인을 나쁘게만 생각했는데 지구에 올 때 떨렸을 거 같아요. 여긴 처음 와봤을 테니까요."
"그런 신사라면 소행성을 훔쳤겠어?"
망막 손상 과학자 하켄루퍼 박사가 아드로를 따로 불러서 했든 그 말을 기억해야 한다.
"너의 길을 가라. 너 자신이 호기심이야"
4. 사라져 간 페이지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며
현대과학의 역설이 있다. 물리적 세계에 대해 알면 알수록 미스터리 역시 커진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 역시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사진을 잘 찍는 사진가도 있고 수재들의 기이한 발명이 넘쳐나지만 질문은 늘어만 간다.
어느 날 오기는 전기 버너에 스스로 손을 가져가 덴다. 연기하는 배우조차 오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극에서 빠져나와 연출가에게 찾아가 혼란을 털어놓는다. 이해가 안 되는 데도 이 연극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우드로에게 신경 써주지 못했던 아빠 오기는 연극에서 빠져버린 장면 속으로 찾아간다. 발코니 너머에 세상을 떠난 엄마가 꿈결처럼 다가와 있다. 배역에서 탈락해서 미처 세상에 나오지 못한 그 장면이 연극에서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한 권의 책 속에 선택되지 못하고 사라져 간 보석 같은 페이지들처럼. 탈락할 한 페이지를 향해 전력질주하며 씨름했던 어느 작가의 손끝을 기억하게 하는 장면이다.
지금껏 달려온 그 어떤 장면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다정함이 담긴 엄마의 언어로.
연극이 계속되는 동안 떠오르는 모든 질문들에 대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계속 나아가는 길 속에 농담 같은 외침을, 노래를 들려준다.
https://www.youtube.com/watch?v=H00B9-cD-BY&t=11s
이제,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시간이 다해가고 있다. 서로 다른 이들이 격리된 채 모여 한바탕 사건을 치르고 헤어질 시간이다. 꿈에서 깨었지만 잠들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을 세계를 가득 안고 저마다의 삶 속으로 흩어져간다.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때 한 번쯤 머물고 싶은 그곳이다.
<에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 2023>은 넷플릭스와 왓챠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