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 애들론의 <바그다드 카페>
1. 장소와 끌림, 콜링 유 (Calling you)
나는 항상 어떤 장소들에는 자력이 있어서 그 부근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면 사람을 그곳으로 끌어당긴다고 믿었다.
- 파트릭 모디아노,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중에서
파트릭 모디아노는 어느 감상적인 철학자가 '잃어버린 젊음'이라고 부를만한 카페를 이야기한다. 파리의 라탱 지구의 흔한 평화로운 카페보다는, 약간의 우울함이 깃들어있는 장소.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놀라지 않을 것 같고 손님들에게 어느 정도 관대한 여주인이 있는 카페에 대한 끌림이 소설이 되었다.
어떤 장소에는 자력이 있다는 말이 흥미롭다. 그럴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는 따로 있다. 산책의 묘미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저기는 뭐 하는 곳인가 궁금해지다가 어느새 단골이 되어있다. 비슷한 호기심이나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기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소설가는 그런 장소의 비밀을 주인에게 찾아낸다. 카페의 분위기, 메뉴, 음악 그 모든 것은 결국 주인에게서 나오는 것일 테니 너무 당연한 일일까.
그런데 그 카페의 주인은 관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막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것 없는 권태로운 표정 위로 그 노래가 들려온다. 이 지경에 이르면 피로와 한숨, 절망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통곡하며 펑펑 울만한 기운조차 없다. 낡은 카페 앞에 앉아 두 뺨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을 내버려 두고 바깥을 바라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oCLpLWcX2cg
그때 누군가 눈앞에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이곳 사람이 아닌 외지인이다. 그 뜨거운 사막을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어디서부터 걸어온 것일까.
카페 주인은 눈물을 슥슥 닦아내고 여행객은 땀범벅이 된 얼굴에 손수간을 댄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친다. 눈물 속에 잠긴 일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한 기대감이 만났다. 다른 만남들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2. 사막의 커피 없는 그 카페
모하비 사막 어딘 쯤 자리한 바그다드 카페.
모래바람으로 텁텁한 목을 적셔줄 맥주도 없고, 커피머신은 고장난지 오래다. 보온병에 담긴 임시 커피를 따라주는 곳.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카페주인의 테이블엔 먼지가 자욱하다. 한쪽 구석에선 아들이 낡은 피아노를 친다. 아기 울음소리도 들린다. 딸내미는 심심한 이곳을 벗어나 놀러 갈 궁리만 한다. 튀는 패션의 노인과 젊은 타투이스트가 어슬렁거리고, 밖에선 배낭족이 부메랑을 날리고 있다. 어딘가 세상에서 동떨어진 사람들이 모여든 곳. 크게 무리일 것도 없지만 무엇인가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카페주인 브렌다는 혼자서 카페며 모텔, 주유소를 운영 중이다. 남편은 집을 나갔고 자식들은 집안일엔 관심조차 없다. 혼자 악다구니를 쓰며 다그치지 않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버티는 중이다.
독일에서 왔다는 그 손님은 좀 수상하다. 어쩐 일인지 손님이 직접 청소기를 밀게 되는 모텔이지만, 브랜다가 외출한 사이 도움을 주고 싶어서 카페를 구석구석 청소한다. 불필요한 물건은 내 다 버리고 간판의 먼지도 털고 주유저장고까지 올라가서 닦아낸다.(그리고 보니 청소를 좋아한다는 건 괜찮은 사람이라는 하나의 신호인 것 같다. 내 물건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배려한다면 더 그렇지 않을까)
모두 깨끗해진 카페를 반기는 눈치인데, 단 한 사람은 예외이다. 오히려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더 해가며 경찰에 신고까지 한다. 그래도 야스민의 방엔 사람들이 몰려든다. 딸도, 아들도, 어슬렁거리던 그 할배도.
3.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의 마법
사나운 말만 내뿜던 브랜다가 한 발짝 물러선다. 항상 친절한 야스민에게도 말로 다 못할 그만의 사정은 있다. 왜 굳이 이렇게 청소까지 했느냐는 질문에 좋아할 줄 알았다는 대답은 진심이었다.
손님 없을 때만 쳐야 하는 피아노 연주에 다가가서 들어주고, 한창 옷에 관심 많은 십 대 소녀에게 옷도 빌려준다. 할리우드 무대디자이너였다는 할배의 청을 받아들여 그림 모델도 되어준다.
마지막 남은 적군마저 동지가 된다. 브랜다에게 빨간 장미를 선물해 보니, 그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왕년을 그리워할 것 같은 할배지만 그의 그림에는 미스터리가 있다. 하늘에 비치는 빛줄기를 야스민이 '비전'이라고 불러주자, 작품이 의미를 찾아간다. 그 빛은 타투가 되어 사람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바흐 곡 피아노 연주에는 생기가 돈다.
남들을 기쁘게 해 주려고 시작한 일이 카페의 마술쇼가 되었다. 이제 바그다드카페는 라스베이거스의 쇼 못지않게 사막을 지나는 이들의 핫플레이스가 되어간다. 한 사람의 작은 친절이 이 카페를 드나드는 이들을 위한 환대가 되었다.
야스민의 친절이 처음부터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낯선 사람들 사이의 벽을 깨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거부당한 친절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한결같은 태도도 있어야 한다. 마술처럼 피어난 꽃들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위트 넘치는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난로에 덴 고양이는 난로에 앉으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식은 난로에도 앉지 않는다고 했던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먼저 손을 내민 것이 야스민의 진짜 마술을 피어나게 했다.
4. 언젠가의 꿈처럼 기억되는 곳
코앞에 빌딩만 빽빽한 곳에 사는 이들에게 지평선이 보이는 풍경은 하나의 꿈처럼 다가온다.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 위 하늘로 번지는 저녁노을과 구름의 색조, 오래되어 투박한 방안의 가구와 소품들, 벽에 걸린 낯선 그림들, 트럭 바퀴 아래 굴러가는 먼지들의 날림까지도 미세한 울림으로 기억된다.
일상을 바꾸는 것은 대단한 일에 있지 않다는 것을 놓칠 때가 많다. 위대한 것들은 길모퉁이나 어느 식당의 회전문에서 시작된다고 했던 카뮈의 말을 떠올린다.
과연 우리에겐 누군가에게 먼저 손내밀 수 있는 배려가 있을까, 그것도 안 된다면 누군가의 부름에 귀기울이고 있을까.
마법을 기다리고 있다면 모하비의 바그다드카페에 들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바그다드 카페 Bagdad Cafe, 1987>은 왓챠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