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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Nov 25. 2024

서울의 중세적인 거리 2

일요일 늦은 오후 을지로 인쇄소 골목에서

남산한옥마을을 나왔다.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지인의 결혼식이 있었다. 스패니쉬 기타리스트와 플라멩코 댄서 커플의 전통 혼례였다. 스페인의 카탈루니아 지방에서 공부하다가 만난 인연으로 결혼까지 온 부부의 하객들은 반 이상이 외국인들이었다. 각 나라 전통 복장으로 참석한 사람들로 북적이는 가운데, 한복을 입고 연지 곤지 찍은 신부와 신랑의 맞절이 다른 차원처럼 다가온다.

TV 속의 사극도 아니고, 쇼도 아니다. 그래, 여기는 한국이지. 수수한 나무빛의 한옥과 처마 아래 원색의 한복이 도드라진다. 불어오는 바람에 긴소매자락이 펄럭인다. 햇살 아래 두 사람의 미소가 눈부셨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다가, 갈아타지 않는 역 쪽으로 좀 더 걷기로 했다. 날씨가 좋은 날엔 좀처럼 지하로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을지로 방향으로 걸었다. 일요일 오후 4시의 거리는 한산하다. 가게들의 셔터는 내려졌고, 인적도 드물다. 식당가가 보이니, 가끔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가게들이 있다. 

반쯤 닫힌 철제문 위로 '칼국수'라고 쓰여있는 궁서체의 간판들, 좁다란 테이크아웃 커피점, 간판도 제대로 걸지 않은 백반집들을 지난다. 텅 빈 거리는 뚜벅뚜벅 발소리만 울릴 정도로 적막했다.


이 골목 어디쯤에 그 식당이 있었나.

백반기행 프로그램을 하는 후배작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을지로 노포 중에서 기막힌 코다리집이 있는데, 그 집만의 주문의 법칙이 있다. 테이블 당 소주 각 일병은 기본인 집들은 흔하다. 그 집만의 규칙은 일 인당 코다리찜 한 접시 이상은 주문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때문이죠?" 같이 떠들던 동료가 물었다. 

"몰라. 그냥 한 접시만 주문." 

너무 배부르면 맛이 없어져서 그럴까. 배달은 안 하는 식당처럼. 

어느 시대 가게인가. 장사의 법칙을 살짝 비켜난 지점에 호기심이 든다. 사장님이 궁금해진다. 그 미스터리를 분석하기 위해 같이 가보기로 했는데 아직도 못 갔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저 많이 팔기만 하려는 식당은 아니라는 사실. 아직도 골목 곳곳에 자신만의 고집을 지켜나가는 이런 가게들이 헌 책 속에서 집어든 책갈피처럼 숨어있다.


철커덕 소리가 들렸다. 


어느 여름날 필름 현상소에 가는 친구를 따라 이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발바닥이 뜨거워질 정도로 달구어진 도로 위를 걸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골목을 돌아서니 수동으로 움직이는 운반차가 보인다. 오토바이 뒤에 바퀴를 두 개 달고 그 위에 물건을 담을 수 있도록 만든 수레차. 뒷 칸에는 책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가게들 사이를 옮기기 위한 이동수단으로 좁은 길에서 빠르게 물건을 싣고 내리기엔 차보다 간편하다. 이 거리에서만 볼 수 있는 수레차들. 걸리버 왕국의 또 다른 영토에 도착한 듯 을지로 인쇄소 왕국에서는 이 수레차들만 통용된다.  

한낮의 허름한 노포에서는 어르신들이 반주를 곁든 점심을 드시고, 그 바깥에는 아직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책자를 실은 오토바이 수레들이 덜컹거리며 돌아다닌다. 어느 가게에서는 철컥철컥 묵직한 종이들을 썰어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먹성 좋은 기계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다가 규칙적으로 종이를 삼키고 뱉어낸다. 종이를 써는 소리를 자세히 들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둔탁하면서도 뚝 끊기는 소리. 그리고 적막 다시 소리가 이어지며 시간의 틈을 메우는 것처럼 하루가 움직인다.

이렇게 종이들이 옮겨지고, 색을 입히고, 인쇄기가 돌아간다. 인쇄소 왕국의 익숙한 루틴으로 능숙하게 운반차에 인쇄물들이 올라가고 차는 빠르게 출발한다. 행인들은 무심하게 그저 가던 길을 간다.


일요일의 인쇄소 골목은 한적했다. 도로 한쪽으로 비켜서 있는 수레차들. 닫힌 문 안으로 비치는 한 무더기의 책들. 멈춰진 수레차 위엔 박스들과 짐들이 놓여있고 수건도 걸려있다. 거칠게 시멘트로 메워진 바닥은 꺼믓꺼뭇하니 오랜 세월의 자국들이 남아있다.


문득,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다. 가게들은 다 문을 닫았는데 찾을 수 있을까. 

그때, 마법처럼 작은 카페 창에 걸어놓은 아이스크림콘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려있었고, 자석처럼 이끌려서 들어갔다. 테이블 서너 개 정도의 아주 좁다란 카페. 작은 창 너머로 오후의 햇살이 바로 쏟아졌다. 카페는 빛으로 가득 채워진다. 콘을 하나 골라서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오래된 유리라서 약간 뿌옇게 보였는데, 오히려 과거를 비추는 프리즘처럼 바깥 풍경이 아득하게 들어와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햇살마저도 과거의 빛처럼 아련했다.

'와, 여기 운치 있네.'


도로의 초록 이정표에는 '삼일대로'라고 쓰여있었다. 좁고 긴 도로들은 말없이 고요했지만 달리는 차량 아래로 시간이 묻혀있다. 이 거리는 어떤 곳이었을까. 그저 평온했던 동네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삼일대로에 대해 찾아본다. 설명을 읽고 또 읽는다. 


삼일대로는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100여 년 전 태극기가 휘날리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던 그곳. 그 시절의 함성 소리가 이 거리에 배어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이 이 거리에 남아있는 것일까. 잠자고 있는 듯 평온한 휴일의 거리는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다. 미처 못다 한 말들을 들려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카페의 창 아래서 녹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 거리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 호사처럼 다가온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또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들이 백 년 전 이 거리의 주인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을 지나 내가 이 거리에 서 있는 것이다. 나와 이 거리만의 비밀이라도 알게 된 것처럼 아주 잠깐의 소란스러운 오후의 틈을 엿본다. 다른 시대를, 또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날이 좋은 날 4시에서 6시 사이에 우리는 친구들에게 알려진 자아를 잠시 벗어둔 채 익명의 보행자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화국 군대의 일부가 된다. 자기만의 방에서 고독을 맛본 뒤인지라, 그들과의 사교가 참으로 기껍다...우리는 그들 각자의 삶으로 조금이나마 들어가볼 수 있고, 그 경험만으로 실은 자신이 하나의 영혼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그저 잠시라도 타인을 걸쳐볼 수 있는 존재라는 환상을 품게 된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우리는 익명의 보행자들가 되어 잠시라도 타인을 걸쳐볼 수 있다. 집 밖으로 나설 때 그 일이 시작된다.


또 다른 손님의 발소리가 들린다. 중년의 남자분이 카운터로 다가간다. 주변에서 일하는 분 같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카운터 뒤에 앉아있던 여주인이 벌떡 일어난다.

"따뜻한 거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손님도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답한다. 

"차가운 거요."


커피머신이 돌아가는 소리, 잔에 얼음이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컵을 손에 쥔 손님이 나간다. 

아차, 시계를 본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나가야 한다.

카페를 나섰다. 안녕히 가세요, 여주인의 경쾌한 인사말이 작은 공간을 울린다.

이제 막 을지로 인쇄소 골목을 소개받은 것 같다.


다음 약속은 을지로의 아주 좁은 건물 틈새에 있는 그 커피집으로 정했다.


(중세거리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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