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들이 다 잘 될 거야
네온의 계절, 겨울이다.
밤이 긴 계절일수록 네온 간판의 빛이 더욱 오래갈 테니까. 짙은 밤일수록 그들은 더욱 빛난다.
화려하고 깔끔한 거리는 네온 입장에서는 어쩐지 좀 시시하다. 어딘가, 불쑥 귀신이라도 나올 듯 으슥한 곳에서 자신들의 진짜 정체성을 환하게 드러낼 수 있다.
네온 하면 떠오르는 바(bar)가 있다. 을지로 골목들을 돌고 돌아 도착하면 어렵게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입구에서부터 과연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하게 고민하게 되는 숙제를 안겨주는 곳이다. 태풍에 날아갈듯한 낡은 간판에 폐점된 곳은 아니지, 의심 하나를 건너야한다. 그리고 나면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의 5층계단이 기다리고 있고, 도대체 이 계단을 올라가면 그 끝에 뭐가 있기나 하긴 한 걸까 의문이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 계단을 오르는 건지 호러영화의 도입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의구심을 떨지고 나서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문을 열면, 음악 소리와 뒤섞인 왁자지껄한 사람들 말소리에 안도감이 들고 그 어둑한 공기 속에서 네온 불빛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네온 간판 '신' '도' '시' 각각의 글자들이 천정에 붙어있다. 어수선하다고 해야 할지 키치 하다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분위기에 눈이 휘둥그레지다가 어느새 플라스틱 접시에 담겨온 강냉이를 씹고 있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명소가 된 곳이다.
깜빡이는 불빛으로 도시를 밝히는 미술가가 있다. 영국 yBa (young British artist)의 일원인 그는 불빛을 깜빡거리기만 했을 뿐인데, 상을 탔다. 영국에서 해마다 연말이면 TV로 생중계되는 아티스트 시상식이 있다. '터너 프라이즈(Turner Prize)'는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이름을 따서 제정된 시상식으로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에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2001년 터너 프라이즈 우승은 '작품 번호 227번'이 차지했다.
수상작에 대한 기대를 잔뜩 안고 찾아온 관객들이 성큼성큼 들어간다. 그런데, 전시장에 뭐가 없다. 빈 공간에 그저 5초마다 불이 들어왔다 꺼졌다 하며 깜빡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냥 그게 다다. 불만 깜빡깜빡.
관객들은 또 숙제를 떠안는다. 이건 뭐지? 여기서 뭘 느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무엇을?
상까지 탄 작품인데 뭐가 있긴 할 거 아니야.
뭘 찾아내지 못한 관객들은 결국 화를 낸다. "이것도 작품이냐?"
분노를 잠재울 수가 없다. 작품에 달걀이 퍽 날아온다. 깜빡이는 빈 공간에 깨진 달걀이 번진다.
작품은 슬슬 논란이 된다. 여기서 끝일 리가 없다.
이 소식을 들은 택시들이 전시장 앞에 모여들었다. 택시 운전사들은 헤드라이트를 켰다 껐다를 반복한다. 이 전시를 모방한 하나의 시위이다.
"지금 그 전시장에 있는 게 작품이라면, 우리가 켰다 끄는 이 불빛도 작품이겠네?"
여기서 놀랐다. 런던이 미술이 이토록 대중적일수 있는 도시라는 것도 그렇지만, 그 시위의 수준도 엄청난 것 아닌가. 이 정도로 작품을 보고 자신의 감정을 시위로 보여준 열정과 표현력. 택시 운전사들의 클라쓰이다.
터너 프라이즈는 이런 인기에 힘입어서 수많은 스타 작가들을 배출했다. 대표적인 작가가 1995년 수상한 그 유명한 데미언 허스트이다.
이쯤 되면 작가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나서서 입장을 밝혀야 한다. 모두가 수상자의 답을 기다렸다. 마틴 크리드(Martin Creed)는 긴장이나 초조한 기색은 없었다. 그저 여유롭게 한마디 했을 뿐이다.
"이것이 작품이 아니라면, 당신들의 반응은 뭐였을까?"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웃음이 났다. 그는 현대미술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사물에 개념을 불어넣는 것. 마틴 크리드는 변기를 '샘'이라고 명명했던 뒤샹이 그랬듯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다. 아주 평범한 도구들을 비일상적 상황으로 만듦으로써 익숙한 것들을 다시 보게 했다. 단순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써서 뚝딱 만들고, 해체하는 그의 작업들은 경쾌하고 유머가 담겨있다.
"예술이라는 것은 그냥 무언가를 만드는 거예요. 나는 이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묻거나 결정하지 않아요."
마틴 크리드는 자신을 예술가라고 칭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작품들도 예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요즘처럼 아티스트라는 자의식이 난무하는 시대에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누가 예술가라고 불러주는 것이 그를 예술가로 만드는가?
작가 자신인가, 타인들인가.
마틴 크리드는 사무엘 베게트를 언급하며 작품 속에 드러난 반복의 의미를 확장한다. 무의미해 보이는 행위의 반복과 변주, 삶의 허무와 부조리 사이의 유머, 그리고 인간 존재와 불확실성을 탐구했던 베게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다시 시도하라, 실패하라, 더 나은 실패를 하라(Try again Fall again Fall better)'고 했던 베게트의 말이 작품으로 살아난다. 그는 이렇게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
2011년 뉴질랜드 제2의 도시 크라이스트처치는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한동안 문을 열지 못했던 미술관이 다시 오픈하면서 마틴 크리드의 작품이 걸렸다. 어둠이 짙어지면 네온 간판에 빛이 들어온다. 무지갯빛 글자들이 도시를 밝힌다.
"모든 것들이 잘 될 겁니다. (everything is going to be alright)"
성공한 작가에게도 우울증은 찾아온다. 마틴 크리드가 한동안 우울증에 빠져있을 때 한 친구가 던진 말이 그에게 힘이 되었다. 빈말이면 어떤가. 그 말에 기운을 되찾은 작가는 그 위로를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작업했다. 그렇게 이 작품은 뉴욕시 한복판에, 쇠락하여 철거될 영국의 고아원에, LA의 갤러리에 걸렸다.
<외로운 도시>의 저자 올리비아 랭은 예술의 비상한 기능에 대해 말한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을 중재하는 기묘한 능력. 모든 상처에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모든 흉터가 추한 것은 아니다. 예술은 이 상처를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상처를 치유한다.'
모든 상처에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바라봄으로써도 우리는 치유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던진 작은 위로가 무지개색 불빛이 되어 세계의 도시 위를 여행하고 있다.
지구가 반짝이는 하나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