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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Dec 09. 2024

우리는 부엌에서 특별해지지

요시모토 바나나, 하루키의 손녀딸, 그리고 모네의 부엌

부엌을 다시 보게 된 것은 그 소설 때문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의 첫 문장이다. 주인공 미카게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장례식까지 치르며 못 들다가 가장 편히 있는 곳을 찾아낸다. 

바로 부엌의 냉장고 옆이었다. 눈물도 말라버린 시간들 속에서 그는 부엌 바닥에서 라이너스처럼 담요를 돌돌 말고 잠을 청한다. 깜깜한 어둠 속 위잉-하는 냉장고 소리가 그의 고독을 지켜주었다. 포근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어둠을 보내고 햇살 아래 눈을 뜨고 싶었다. 

슬픔과 고통의 나날은 안락한 장소보다는 거칠더라도 정서적 연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미카게는 누군가의 집을 볼 때도 제일 먼저 부엌을 본다. 친구와 가까워진 것도 그 집의 부엌 때문이었다.


'나는 차를 끓이는 그의 뒤로 돌아 부엌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마룻바닥에 깔린 깔끔한 매트, 유이치가 신고 있는 슬리퍼의 고급스러움- 필요한 최소한의 부엌 용품들이 반듯하게 걸려있다. 오랜 세월 길들여진 도구들. 실버스톤 프라이팬과 독일제 껍질 벗기기 칼은 우리 집에도 있었다. 게으름뱅이 할머니가 껍질이 술술 벗겨지지 신나 했다.'


필요한 최소한의 부엌 용품이 있는 소박한 장소, 거기에 우리 집에도 있는 도구를 본다면 그 집주인과는 좀 더 가까워질 것 같다. 한 사람이 일생동안 겪을 슬픔을 한꺼번에 맞아야 했던 젊은 날의 미카게에게 부엌은 그런 장소였다. 사람이 다 줄 수 없는 따뜻함이 머물 수 있는 공간.


크리스마스 즈음 그 부엌을 자주 드나들었다. 일명 손녀딸의 부엌, 네타스 키친이라는 곳이 홍대 근처에 있었다. 손녀딸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등장인물에서 따온 닉네임이었고 그곳엔 이국적인 음식들이 가득했다. 소설에는 '분홍 옷을 즐겨 입고 뚱뚱하지만, 얼굴이 예쁘고 요리를 잘하며 남자에게 관심이 많은 노박사의 손녀딸'로 소개되어 있다.   

소설과 요리를 좋아하는 그 부엌의 주인장은 요리사들이 흔히 그렇듯 통통한 체구에 시원스레 웃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여행을 많이 다니고 특히 남미를 좋아해서 살사댄스- 특히 메렝게를 즐기는, 말 그대로 '하루키스트'였다. 한번 보고 사람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집에서는 잘 만들지 않는 음식을 가볍게 구해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자주 드나들었다. 음식이 맛있으면 사람은 평가에 후해지는 법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크리스마스 마켓도 열었다. 산타 모자를 쓴 주인장은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며 물건을 포장해주고 있었다. 네타스키친은 그지 크지 않았고 화려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도 아니었다. 거친 철제 앵글을 벽에 두고 알록달록한 식재료들을 쌓아두고 나무 합판으로 붙여진 벽에는 갓 프린트된 종이에 가격표들이 붙어있었다. 작업대 같은 긴 테이블 위에 음식들을 진열해 두고, 시식용으로 처트니를 바른 크래커 조각이 담긴 접시가 놓여있었다. 병에 담긴 음식들에는 손녀딸 일러스트가 붙어있었다. 양상추가 삐죽이 나와있던 푹신해 보이는 치아바타 샌드위치도 생각난다. 커피 드립도 직접 해서 커피 향이 진동했다. 무엇보다도 음악! 진열대 한쪽에 틀어놓은 음악을 들으며 음식을 구경하는 재미야말로 이 부엌의 진수였다. 가게가 너무 크지 않아서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크리스마스 장터에서 몇 가지를 골라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실컷 수다 떨고 집으로 돌아가서 심심한 방에서 각자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크림을 과자에 발라먹고 있다고 상상하니 겨울이 조금 더 따뜻해진다. 집에서 만들어먹는 생강라테는 뭐든지 녹일 수 있을 것처럼 뜨겁다.


그 부엌에서 파는 음식들은 올리브 절임과 바질페스토, 직접 만든 생강 진액, 망고 처트니, 라임 커드 같은 것들이었다. 주인장은 '하루키 레시피'라는 책도 냈다. 하루키 팬들의 필수 코스였을 것이다. 그 책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키는 음식을 통해 평범한 사람을 예술가로 만든다." 


미식가로도 소문났던 화가, 모네의 부엌도 손꼽힌다. 지베르니에 있던 그 부엌은 늘 손님을 대접할 준비로 분주했다. 지인들 사이에서 모네의 집은 호화로운 코스 음식으로 알려졌고, 모네는 음식에서의 모험을 즐겼다. 여행자들의 코스가 된 그 집을 가보면 그의 감각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고 전한다.

창작공간을 연구하는 멀리사 와이즈에 따르면 모네는 대단한 대식가였고 그 부엌에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거대한 오븐과 구리 냄비와 팬이 종류별로 갖추어져 있었다. 벽의 푸른색 타일에는 별 모양과 백합 패턴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특히 모네는 타일을 좋아했던 거 같다. 루앙에서 온 그 타일들은 모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부엌을 루앙 타일로 장식하자 모네의 예술 활동이 그의 집에도 메아리치게 되었다. 타일에는 루앙 타일 제작자들의 장인정신, 그리고 모네가 살았던 노르망디 지역의 유기적 형태와 붓질이 깃들어 있는데, 이 덕분에 모네는 훨씬 오래되고 더 광범위한 동시대의 창작 전통과 연결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


타일 조각에서도 창작의 전통과 연결되려 했던 화가의 열정, 소설 속의 인물을 끄집어낸 어느 요리사가 창조한 모두의 부엌, 그리고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따뜻한 잠을 주었던 작가의 장소까지.

우리가 아직 모르는 부엌의 이야기들이 아직도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장, 부엌을 바꾸려 할 필요는 없다. 

자세히 보고 손길을 주면 부엌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키친>의 미카게가 좋아했던 추억이 얼마든지 나의 부엌에도 찾아올 테니까.


'나는 한밤의 부엌에서 끔찍한 소리를 내며 만들어지는 두 사람 분의 주스 소리를 들으며 라면을 끓였다. 굉장한 일인 것도 같고, 별 일 아닌 것 같기도 하였다. 기적 같기도 하고,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였다. 

아무튼 나는 말로 표현하자면 사라져 버리는 담담한 감동을 가슴에 간직한다. 시간은 많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밤과 아침,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런 때가 꿈이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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