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신촌 점심 모임에서
창문을 열어보니 눈 쌓인 지붕이 보였다.
큰 눈이 한바탕 내린 다음 날 점심 약속이 있었다. 신촌 한 복판에 있는 50년 넘은 오래된 갈빗집. 한참 잊고 있던 그 길을 걷는다. 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를 사이로 학생들이 재잘대며 걷고 있다. 큰 교회의 크리스마스트리를 지나고, 길 가의 작은 가게들, 낯선 간판들을 살피다가 건널목을 건너니 어느새 도착했다. 아직 녹지 않은 눈길을 살피며 걷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린다. "언니! "
미국에서 사는 사촌동생이 들어왔다. 흔히 그렇듯 병원에 갈 일이 있어서 온 건데 이렇게 된 김에 친척들이 함께 식사라도 하자고 말이 나온 것이다. 엄마와 이모들, 삼촌과 외숙모 그리고 사촌동생과 나. 시간이 되는 사람들만 나오는 번개모임이다.
작은 룸으로 들어가니 숯불의 열기로 훈훈하다. 난로처럼 손을 가져다 대며 안부 인사가 이어진다.
명절 때 가족모임도 겨우 참석하는데, 친척들 모임에 함께 한 것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신촌에 다 애들밖에 없어요."
"우리가 나이가 많아진 거야."
사촌동생이 웃는다.
이제는 머리가 희끗해진 이모들과 삼촌의 수다가 시작된다. 그 시절 흔히 그렇듯 엄마 형제도 5녀 1남. 대가족이다. 뭔가 예상되는 조합.
삼촌이 태어나면서 그 시절 엄마들의 숙제가 마무리되었다. 여자 형제들 사이 자란 남자애들은 또 수다력이 출중하다. 외숙모는 농담 삼아 툴툴댄다.
"아니 그 많은 여자 동창들이 왜 다 이쪽으로 전화 오는지 모르겠어요."
메뉴를 생갈비로 할 것인지 양념갈비로 할 것인지 묻는다.
이모들은 무조건 양념갈비라고 했다. 서빙하는 분이 기분 좋게 대꾸한다.
"우리 집에 많이 와본 분들이신가 봐요. 양념갈비가 맛있거든요!"
화로 위로 갈비가 올라온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사이 어린 시절에 대한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오간다. 맛으로 따지자면 요즘 화려한 파인다이닝이나 호텔 메뉴들에 비할까. 그저 맛집이라서 온 것은 아니었다.
이모들은 이 집에 옛날 맛이 있다고 했다. 사실,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집이었다. 오시면 무조건 양념갈비였다. 동네에서 가까운 식당을 두고 항상 이 집을 고집해서 자주 오곤 했지만, 돌아가신 이후로 그 마저도 옛일이 되었다.
옛날 집, 옛날 맛. 이 날의 주제였다.
형제가 많은 집은 이야기도 많다. 일단 음식을 한번 만들기 시작하면 넉넉히 하는 것이 일상이 된 이유가 있다. 넘치도록 하고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면 되니까. 이모나 삼촌들은 동네에 떡을 돌린 얘기를 했다. 삼계탕은 어린 시절부터 1인 1 닭이어야 했다. 여자 형제들이 많다 보니 옷으로도 많이 다툼이 났다. 이모는 언니 옷을 사 오면 먼저 입고 동네를 돌며 패션쇼를 했다고 했다.
형제라고는 남동생이 전부인 나에게 대가족 형제 이야기들은 신세계다. 어린 시절에는 다툼이 잦았을지 몰라도 그만큼 추억도 많아진다. 형제들이 많아서 이렇게 옛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구나 싶다. 접시 부딪히는 소리, 고기 굽는 소리, 물을 따르는 소리, 때때로 번지는 웃음소리. 모처럼의 점심상은 따뜻하다.
한창 얘기가 무르익을 무렵, 사촌동생이 한마디 꺼냈다.
"외할머니 흉보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그러게."
그러니까 딸들이 모여서 엄마 흉도 보고 하다가 결국 엄마 좋아하는 식당에 오는 약속이 마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같이 흉을 볼 수 있으면 그건 진짜 관계라는 뜻은 아닌까. 어떤 면에서 그건 아주 특별한 관계다. 피를 나눈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예전에 일로 만났던 어떤 교수님은 그런 얘기를 했었다. 자신을 따르는 후배들과 여러 뜻 맞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모임이 있는데, 나에게도 같이 하자고 권한 적이 있다. 그러고는 이런 얘기를 덧붙였다.
"그 친구들 나 없으면 신나게 내 흉보고 있을 거예요. 같이 들어와야죠."
흉볼 일이 전혀 없는 무결점 에피소드라면 완벽하겠지만, 그건 대개 꾸민 이야기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내보이기 위한 목적이 잠재되어 있는 상태. 우리가 알 듯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결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단점에 의해서 더욱 살아나는 것이다. 흉볼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끌어안을 수 있는 관계.
나는 그날 갈빗집으로 오게 만든 이모들 이야기의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도 그분을 떠올리는 시간은 이렇게 찾아온다. 의도하지 못한 시간의 틈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절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세월은 어떤 것이었을까.
미처 말해지지 않은 책임감과 지독한 성실성. 그 시대의 아버지들의 어깨에는 늘 얹혀있던 것이었다.
언젠가 보았던 글이 떠오른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월을 지나온 아버지의 삶이 전혀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에게는 모르는 사이에 조상들이 보낸 시간의 유전자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그 '눈먼 성실성'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수저 두 벌과 참기름 한 병.
이것이 10년 동안 돌 쌓고 기와 구워 번 돈을 네 할아버지께 드린 후 엄마와 내가 분가해 나올 때 가지고 온 전재산이었지,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시곤 했다.
불평 한 마디 없이. 그렇게 또 일하며 번 돈과 그 이상을 빌려 방앗간을 마련한 다음 두 분은 밤낮으로 일을 하셨다. 발동기가 고장 나면 아버지는 새벽이 되도록 이쪽을 살피고 저쪽을 끼우며 맞춰보곤 했다. 저녁밥은 다음날 새벽에야 드셨다. 이 일로 어머니가 상심하였음은 물론이다.
모든 성실성은 눈멀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 엄혹한 성실성만은 반의 반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삶의 어진 뿌리가 되어 예의의 끝을 지켜낸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김우창의 인문주의> 중에서, 문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