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어둠을 지나고 있을 때라도
"능금 한 알이 떨어졌다. 지구는 부서질 정도로 아팠다."
시인의 읊조림은 우리의 가슴을 내리친다. 이상의 시 <최후>의 첫 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능금 하나에도 지구는 아프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세상의 아주 사소한 죽음이라 해서 지나칠 수는 없다. 나의 고통에도 세상은 부서질 정도로 아팠으면 좋겠다. 그 충격으로 아찔해져야 당연한 것 아닌가.
세계는 그를 위해 멈추어야 한다.
그 문장에 시선이 한참 머문다.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알려진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는 이렇게 썼다.
"세상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개인에 관계없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연인과 헤어진다면 세계는 그를 위해 멈추어야 한다."
단지 연인과의 이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나에게 다가온 그 사건들. 붕 뜬 시간 속을 지나면서 더 큰 놀라움을 마주친다. 나에겐 이토록 엄청난 고통인데 세계는 달라진 것이 없다. 나의 발밑은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데, 어제와 똑같이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정말 슬펐던 적이 몇 번 있다. 겪으면서 여러 가지 몸의 구조가 변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상처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덜컥 겁이 났다. 몸의 구조가 변할 정도로 힘든 일이란 어떤 일일까. 어른이 되고 세월이 간다는 것은 그 아픔을 겪는다는 뜻인가. 아, 그런 것은 별로 모르고 살고 싶은데.
그렇다고, 그런 아픔을 전혀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은 진정한 축복일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보폭이 지극히 좁은 사람으로 혼자 살아가는 것이 행복일까.
늦은 밤 틀어놓은 TV에서는 한강 작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글을 읽고 있다. 그가 품어온 두 가지 질문. 그러니까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알고자 했던 세계를 향한 질문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 것이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왜 이토록 아름다운가?"
자신의 소설로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정치적 탄압을 받아 어디에서도 불러주지 않을 때 책을 알리기 위해서 전국 어디라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던 그의 고백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써 내려가고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이유는 거창할 것이 없었다. 그저 그것이 그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의 소설의 배경에 되었던 제주. 질곡의 세월을 지나면 삶의 낙을 찾을 수 있었을까. 4.3 사태로 가족을 잃은 노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슬픔만 가득했어요. 그런 거 없어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아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슬픔만 가득한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
말하지 않는다고 지워진 것이 아니다. 믿을 수 없지만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 어떤 소설은 그렇게 말해지지 못한 고통을 대신 전해주고 다독여준다.
희생자의 무덤에도 눈이 내린다. 꽃이 놓인다. 무덤을 찾는 이들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슬픔뿐인 세월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아무런 바람 없이 먼저 다가와서 나누려는 이들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므로.
그렇게 소설이 되고, 음악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된다.
각각의 언어로 세상에 씨앗이 흩어지고, 우리가 발 디딘 세계가 조금씩 단단해진다.
2021년 코로나 팬더믹으로 지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모두가 암흑의 시간을 숨죽이며 보내던 한밤중에 노오란 태양이 떠올랐다. 그 빛은 세계의 도시들로 이어졌다. 런던, 뉴욕, 로스앤젤리스, 도쿄 그리고 서울.
운이 좋은 시민들은 서울 코엑스의 옥외 스트린으로 그 해돋이를 바라볼 수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rcEvn5TA_g&t=111s
어느 미술가가 살던 프랑스 노르망디의 집. 부엌의 작은 창으로 서서히 오렌지빛이 들어온다.
강렬한 태양의 빛이 이글거리는 장면이 화면 가득 번지는 풍경 속에 작가는 하나의 메시지를 띄운다.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래 바라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
(Remember that you can not look at the sun or death for very ling) "
-데이비드 호크니
내가 보는 빛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
세상을 진짜로 밝히는 비밀은 그 빛에 있다고 믿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