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런던과 1970년대 뉴욕의 젊은이들
"돈이 없어도 런던에서 신나게 살 수 있었다."
디자이너 폴스미스의 책을 뒤적이다가 멈춘다. 누가 요즘 이렇게 말한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살인적인 물가에 무뎌지며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 최근 런던에 머물고 있는 친구의 메시지다. 인플레이션이야 세계적 흐름이라 해도, 유독 비싼 생활비를 감당해야 하는 대도시들에서 버티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처럼 아득하지만 폴스미스가 20대이던 1960년대의 런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스무 살, 런던에서의 삶은 흥미로웠다. 당시 그곳엔 에너지가 충만했다. 우리는 우리 세대가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경험하고 있다고 느꼈다.'
실제로 1960년대의 런던을 휩쓸던 그 에너지가 몰고 온 파장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시기를 언제부턴가 '스윙잉 런던 (Swinging London)'이라 부른다. 그저 젊은 활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들이 튀어나오기 좋은 시절이었던 것이다. 전후 역대급 인구 폭발을 타고 베이비붐 세대들이 세상을 재건해 보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도전장을 내밀던 때였다. 스스로 월급을 받아 TV, 냉장고, 자동차, 옷을 샀다. 새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이 정치, 과학기술, 문화 전반 어우러져 변화가 갱신되었다. 그 젊은이들은 상류사회의 누군가가 자신들을 초대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스스로가 뛰어들 무대에 직접 초대하는 새로운 실력주의가 등장했다. 이미 익숙해진 '세상을 주도하는 젊은이들의 역사'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1963 발칙한 혁명>이라는 책에서는 당대의 인물들이 그 시대를 증언한다.
"전 그해 머릿속에서 제가 잘 해내고 싶은 것, 다른 사람이 듣고 싶어 할 법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아요. 그냥 제가 미쳤구나 싶었어요. 그 소리가 들렸거든요. (...) 뭔가 다른 일들이 일어나야만 했어요.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그냥 멋지게 변할 수는 없는 거죠. 이상한 기운, 우리는 이상한 소용돌이에 빠져있었어요."
-롤링스톤즈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드
"그 시절의 일부였다는 건 굉장히 멋진 일이에요. '나는 엄청 성공했어'라는 자신감과는 굉장히 다른, 뭐랄까 특별하다는 기분이랄까요. 정신이 미친놈처럼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그저 다음에 뭐가 올건지 생각하면서 계속 열심히 할 뿐이었어요."
- 디자이너 비달 사순
스윙잉 런던을 몰고 온 그 시대의 바람은 그저 성공할 것만 같은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죽도록 이걸 해내서 이루겠다는 야망보다는 지금 이것을 해내고 나면 뭔지는 몰라도 다음에 근사한 것이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가까웠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거나 뼈를 깎는 노력 같은 기성세대의의 가치관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당연히 야망 따위는 없었고, 모두가 그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죠. 돈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어요. 그냥 집세를 내고 신발과 옷을 살 돈만 필요했죠. 오직 그런 것들만 중요했어요. 토요일에 킹스로드를 배회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일이 없었어요."
-모델 패티 보이드
그저 거리를 쏘다니는 것만으로도 시대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사람들의 패션과 새로 문 열고 닫는 가게들, 울퉁불퉁한 도로 위 미세한 바람과 계절마다 다른 가로수들까지도 거리의 표정으로 기억된다. 젊은이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언가를 얻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간다. 어쩌면 젊은이들이 모이는 거리에는 일종의 그 도시의 정체성이 깃들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 밴드 Elbow의 'Newyork Morning'이라는 곡에는 하나의 회고담이 있다. 이제는 티셔츠를 즐겨 입는 어느 노부부가 1970년대의 뉴욕을 돌아본다. 각종 수집품과 바이닐 가득한 그들의 집을 나서서 드라이브를 하며 그 시절 쏘다니던 거리를 떠올린다. 1975년 뉴욕에 도착한 이후, 그들이 거리에서 처음 만났던 사람들과 그곳을 사랑하게 만든 모든 것들을 이야기한다.
뉴욕 경찰에 대한 평가는 뉴욕의 첫밤을 어디에서 보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로 시작된 이야기들은 부부의 만남이 있던 그리니치 빌리지 거리를 떠돈다. 같은 레코드 컬렉션을 가졌고, CBGB 클럽에서 첫 데이트를 했던 그때. 뮤지션들이 어떻게 창작을 하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 자신들이 돈을 쓰는 방식이었다고 고백한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 거리에 머물며 보냈었나에 대해 말하는 그들의 눈빛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qnIbueM5fE
세상을 놀라게 하는 변화를 주도하는 도시들에는 그렇게 추억으로 남을 거리가 있다. 도시계획이나 정비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옛것에 대한 존중을 보일 수 있는 태도는 거리의 구석구석을 채운다. 런던이나 뉴욕 같은 세계적인 도시가 아니더라도 숨겨진 거리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들이 세상과 만나기를 기대한다. 또 앞으로도 새롭게 쓰이길 바란다. 역사상 처음으로 젊은이들이 세상의 변화를 주도했던 1960년대의 런던. <1963 발칙한 혁명>은 이렇게 요약했다.
'그렇게 청춘들은 자신의 역사를 가지기 시작했다.'
폴스미스는 자신의 디자인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폴스미스 옷은 아주 잘 팔린다. 지나치게 비싸지도 않지만, 절대로 싼 편도 아니다. 우리 컬렉션은 엘리트주의를 표방하지 않는다. 고객들은 본인들 눈에 보이는 그 옷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우리 옷을 구매한다.'
이런 취향은 어쩌면 '스윙잉런던'을 지나면서, 런던의 그 거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든 것은 아닐까 싶다. 80세 노인에게도 18세 학생에게도 팔 수 있는 디자인. 엘리트 미디어가 선호하는 방향으로는 맞출 수도 없고 그렇게 한다 해도 사람들은 믿지도 않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얼마 전 우연히 마음에 들어서 고른 빈티지 안경테가 알고 보니 폴스미스의 디자인이었다. 나 역시 그의 말처럼 그저 그 안경이 마음에 들어서 그걸 집어 들었을 뿐이다. 그의 디자인 철학이 나도 모르는 사이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다. 오늘은 그 안경을 쓰고 나가야겠다.
영국이 그때 그랬군요
전 잘 모르는 예술가들이네요
비틀즈가 활동했던 시기도 그때던가요?
시대는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제 느낌이 틀렸으면 좋겠어요^^
@스프링버드 맞아요, 그 시절의 절정이 바로 비틀즈네요.
비틀즈 얘기 하면 또 길어져서 시작을 안 했는데, 맞지요.
그 시절 팝음악계 양대 산맥이 비틀즈와 롤링스톤즈입니다.^^
음악이고 미술이고, 디자인이고 사진, 모든 분야가 다 그 때 엄청나더라고요.
요즘은 SNS만 들여다보다가는 우울해지는 시대죠.
그래도 어딘가에는 있다고 믿고 싶어지네요. ㅎㅎ
구시가지 건물이 텅텅 비어있고 셔터가 굳게 닫힌 흉물스런 건물들을 볼 때마다 그것들의 화려했던 시절들이 몹시 그립고 강렬하게 떠올라요.
독재정권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고 의욕적이고 활기있던. 패션, 음악, 문학, 미술.. 모든 예술분야 다방면으로 충만했던 시절이 90년대 IMF 오기 전까지가 아니었나 싶어요.
스윙잉 런던을 읽으니 문득 드는 생각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제가 라떼이고 꼰대네요 ㅋㅋㅋㅋ
@라이테 작가님 라떼도 꼰대도 아닌데요? ㅋ
정확히 보셨죠. 제 생각에도 90년대 젊은이들은 그 비슷한 시절을 겪었다고 느껴요.
배경이 비슷한 것이...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기도 했고, 소비문화를 누린 첫세대잖아요.
돈돈 거리지 않아도 놀 거 천지였던 기억이...
IMF로 역대급 시련을 겪고 밀레니얼로 세기말 분위기도 겪지만요.
요즘까지도 90년대 문화의 영향력이 크죠. 많이들 하는 얘기네요.
그 시절을 좀 써보려다가 저도 자꾸 라떼같아서 멈칫하고 있는데 조만간 쓸 거 같습니다. ^^
어떤 안경테인지 궁금하네요. 자연스레 끌림이 생기는 건 뭐랄까 나도 알아챌 수 없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의 모든 것들이 순간 섞여서 골랐다고 하면 될까요? 트렌디함 유행을 따르지 않아도 언젠가부터 그것들에게 영향을 받는,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그런 것 말이죠.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중입니다. 따스한 햇살이 창으로 넘어와 손끝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오늘도 즐거운 날 되세요.
새로운 것들이 창조되는 시기에 발생하는 에너지가 대단한 것 같아요. 경제적인 기회가 지천에 널려 있고 날마다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는 문화적 르네상스 시대 말이에요. 지금 세대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고 노력한 만큼 돌아오지 않을 만큼 정체되어 있어서 가끔은 씁쓸하죠. 그래서 보모님 세대가 부러울 때가 있어요. Elbow의 Powder blue란 노래 좋아했는데 덕분에 찾아 들어보네요.
@아옹다옹하다 그러게요. 시대의 어떤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그런 에너지가 발휘되고 또 천재들도 무더기로 배출되는가. 사실 저의 연구 과제이기도 합니다.
지금 세대의 어떤 면을 얘기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근데 또 얼마전 만난 학생은 자기 세대는 마블 영화의 즐거움을 아는 세대라며 신나하더라고요. 나의 세대의 즐거움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 같습니다. 노래 생각나서 찾아들으셨다니 저도 반갑습니다.
@벼꽃농부 작가님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잘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유행을 따르지 않아도 끌리게 되는 선택에는 그런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안경테는 오버사이즈의 심플한 은빛도는 금속재질입니다. 튀는 디자인 아닌데 착용하고 다니면 시선이 좀 느껴지긴 합니다.^^
오늘 따뜻했는데 좋은 하루 보내셨길 바라겠습니다.
이렇게 새벽에 시원한 공기를 맞으며 댓글 친구분들의 글을 읽으면 기분이 아주 천천히 따스해지는 것 같아요. 은빛테를 좋아합니다. 금빛보다 좀 더 차분하다는 느낌이죠. 오버사이즈는 얼굴을 좀더 작게 보이는 효과가 있겠죠. 머리끝이 꼬불꼬불한 펌이면 더욱 센치해보이는 도시풍일 것 같네요. 오늘도 날씨가 좋을 것 같으니... 기적같은 주말이 되지 않을까요~
@벼꽃농부 새벽의 공기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안경을 잘 안 쓰는 편이라 몰랐는데 많은 것들을 알려주셨네요.
작가님도 기적처럼 좋은 주말 보내세요.
개인적으로 옛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같아 무진장 아쉽습니다. 그래서 베리티작가님의 글이 너무 와 닿네요. 나의 취향이라도 지켜 나가야겠습니다. 좋은 글 담아갑니다.
@송단아 그러게요. 옛것을 모르고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을까요.
과거를 잘 살피고 보존하려는, 이어가려는 시도들이 중요한 것 같아요.
또 취향을 가진다는 것, 지켜가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듯 합니다.
글의 뜻을 알아주신 작가님의 공감이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