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3] 레오나르도는 알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보르자 가문 치하에 30년 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미켈란젤로, 다빈치, 르네상스를 낳았지.
스위스는 500년 간 형제애를 유지하며 평화를 지켰지만,
그들은 뭘 낳았나?
고작 뻐꾸기시계뿐이라네."
-<제 3의 사나이> 중에서, 그레이엄 그린
그 영화의 장면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해리는 사악한 눈빛을 번뜩이며 이렇게 말한다. 범죄를 저지른 그의 말은 당연히 악에 대한 자기합리화가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 대사는 잊혀지지 않았다. 설득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전쟁을 합리화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한 편으로 피를 부르는 치열한 전쟁만큼 역사를 뒤흔드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사람의 손 너머의 현상들이 작용한다.
<서양미술사>의 저자 곰브로비치는 유럽에서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나라 이름을 쓰기 시작한 역사가 알고 보면 그리 오랜 일이 아니라고 회고한다. 하나의 왕조가 500년이나 유지되어 온 조선의 역사도 세계사에서 흔한 사례는 아니겠지만, 근대에 이르러서야 체계적으로 나라를 갖추게 된 유럽의 이야기도 낯설기는 하다. 그 전까지는 피렌체처럼 작은 쪼개진 영주들, 왕조들이 싸우고 항복하기를 반복하며 중앙정부가 없는 형태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작게 분열된 영토들, 왕들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아 혼란의 연속이었지만, 한편으로 콜롬부스 같은 인물은 신대륙 발견이라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줄 후원자를 여기저기 물색해볼 수 있었다. 한 왕조에서 거절당했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다. 타격이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조금 추스리고 나서 나를 알아줄 또다른 지역의 후원자에게 PT를 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 셈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피렌체에서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찾지 못했다. 15살 때부터 메디치 가문의 눈에 들어 엘리트 교육을 받아온 미켈란젤로와 다르게 그는 후원자를 만나지 못했다. 장인으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평판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작업을 맡기면 날짜를 못 맞추는 일이 빈번했다. 까다롭고 주문대로 해주지 않는 장인을 오래 참아주기에는 보티첼리 같은 훌륭한 화가들도 얼마든지 넘쳐났다.
이래저래 경제적 여러움을 겪던 다빈치는 밀라노에서 벼락출세한 가문의 요청을 받게 된다. 이미 메인 무대가 된 쟁쟁한 별들이 넘쳐나는 피렌체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조금 낯선 곳에서 새로운 별이 될 것인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던 다빈치는 밀라노로 이사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제 막 신흥부자가 된 밀라노의 루도비코 공. 그는 밀라노를 피렌체에 버금가는 예술의 도시로 만들고 싶었다. 자신의 미천한 족보를 화려한 건축과 예술로 채우려는 야심가였고, 두오모를 짓는 등 대규모 공사를 하면서 여러 예술가들을 불러들였다. 그 리스트 중에 다빈치가 포함되었고, 그렇게 루도비코는 다빈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주군이 되었다.
다빈치의 그 유명한 작품 <최후의 만찬>은 루도비코의 요청이었다. 그 그림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테지만 제대로 경험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그 그림은 평면으로 보는 2차원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니까 성당의 식당 벽면에 압도적인 규모의 벽화로 다가오는 3차원의 세계를 평면으로는 온전히 경험할 수 없다.
불행히도 라고밖에 말할 수 없지만 그가 원숙기에 완성시킨 몇 개의 적품들만이 보존 상태가 대단히 나쁜 채로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다. <최후의 만찬>의 잔영을 볼 때에는 수도승을 위해서 그려진 이 그림이 당시에는 그들에게 어떻게 보여졌을까 상상해보아야 한다. 이 그림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에서 식당으로 사용하던 긴 홀의 벽화로 그려진 것이다.
우리는 이 그림이 처음으로 공개되었을 때에는 어떠하였으며 , 또 수도승들의 긴 식탁이 벽 위에 나타났을 때 그들이 어떤 충격을 받았을지 눈앞에 그려볼 필요가 있다.
-<서양미술사> 중에서, 곰브로비치
다빈치의 발상을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것은 액자에 담겨 미술관 조명 아래 빛나고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예수와 제자들의 마지막 만찬의 장면은 식당의 벽면에 현실처럼 존재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 그림을 볼 수도승들의 상황을 생각해서 가장 적당한 장소를 고민하지 않았을까. 식당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갔을 때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 장면. 오래전부터 성서에서 들어온 그 드라마틱한 장소가 이 자리에 내려와있는 것이다.
1497년 그려진 작품이라 많이 낡고 바래진 것이 안타깝지만, 이제 막 개봉되었을 때 그 식당에 들어서서 벽면면 가득 채우고 있는 최후의 만찬이 어떻게 다가갔을까.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우선은 그 크기에 놀라게 된다고 한다. 예수를 비롯한 제자들이 거의 실물에 가까울 정도로 커서 현실처럼 느껴진다. 그뿐이었을까. 수많은 화가들이 최후의 만찬을 그렸지만, 다빈치가 주목한 것은 조금 달랐다. 다빈치는 그 만찬에서 술렁이는 순간을 포착했다. 식사를 하면서 가장 복잡한 심리를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은 언제였을까. 예수가 던진 한 마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 라고 말한 바로 그 때이다. 그 긴장과 불안, 내면의 변화를 그림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예수와 제자들의 마음, 하나하나를 헤아려보지 않고는 그려낼 수 없는 일이다.
이 그림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가 전해지지만, 그 중 성당에 거주하면서 다빈치의 작업을 직접 보았다는 소설가 마테오 반델로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새벽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작업장에 머물렀는데 어떤 때에는 한 번도 붓을 놓지 않고 쉬지 않고 그렸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에는 며칠이 지나도록 붓을 들지도 않고 그냥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때도 있었다. 하루는 정오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데도 기마상을 만드는 작업장에서 이곳으로 뛰어와 단 두 획만 슥슥 그리고는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뜨거운 밀라노의 태양 아래 하나의 작품에 몰입하는 다빈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어떤 날은 온종일 쉬지 않고 매달렸고 또 다른 날은 한두번 붓질만 했다. 긴 사색과 집중으로 채워진 시간들이 계획된 날짜와 맞아떨어지는 일은 드물었고, 독촉에 독촉을 견뎌야했다. 그는 대충 날짜에 맞춰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내면의 완성작을 이미 품고 있는 장인이었다. 그 이상에 도달할 때까지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대리석을 보면 그 안에 조각상이 보였다고 하는데, 다빈치에게 그 대상은 한 가지 장르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미술사가들이 다빈치를 '과정으로서의 그림'으로 이야기한다. 그가 여타 화가들에 비해 완성작이 많이 않은 이유도 이런 성향때문으로 보인다.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을 비롯해 스무 점 남짓의 결과지만, 연습으로서 노트에 남긴 스케치는 어마어마하다. 다빈치의 광범위한 관심사를 기록하고 스케치한 그의 노트를 정리하면서 생각을 발전시키고 구상해나갔던 것이다. 보기좋은 잘 그려진 그림만을 목표로 했다면, 그렇게 작업하며 오래 사색을 시간을 보냈을 리가 없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명성을 날리는 수많은 화가들과 작품이 있지만, 결국 우리가 다빈치의 몇 안 되는 작품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다.
영화 <제 3의 사나이>에서 르네상스를 말하던 해리는 친구에게 떠난다는 고백을 남긴다.
"내가 아는 건 하나야. 지금 이 순간 빈이라는 도시는 내게 금광이야.
누군가는 거기서 얻어야 하고, 누군가는 놓쳐야하지."
서른을 앞둔 삶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 다빈치는 해리의 심정으로 밀라노로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붙잡아야 할 것과 놓아야할 것들 가늠해보면서.
(다음 편은 다빈치의 캐릭터와 인간관계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