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 다빈치 6] <모나리자>의 비밀

by 베리티

모나리자가 뭐가 훌륭한 그림인지 잘 모르겠다.


솔직한 말이다. 그 그림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교과서에서부터 광고에서, 모작까지 우리는 여러 번 그 작품을 만나왔다. 알고 싶어서 기를 쓰고 루브르까지 날아갔건만, 인파에 떠밀려서 그림을 본 건지 만 건지 후루룩 지나갔다. 어쩌면 슈퍼스타를 군중 속에서 잠깐 스친 기분과 비슷할까. 어차피 조용하게 일대일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실물을 봤다는 정도로 만족하면 좋은 걸까. (아, 모나리자를 혼자 감상하는 데 1억 원이 낙찰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기는 하다.)


'보는 사람은 많아도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법이다.' 존 버거는 말했다. 그의 저서의 제목처럼 '다른 방식으로 보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곰브리치는 이 그림을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오히려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안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점을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다. 사실, 새롭게 보기는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좋든 싫든 뭔가가 많이 그려진 도화지인데, 중간에 새롭게 백지처럼 다 지우고 어떤 대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우선은 시대를 따져봐야 한다. 알다시피, <모나리자>는 1502년경 세상에 나온 그림이다. 2025년을 사는 우리는 온갖 세련된 작품들에 노출되어 살고 있다. 미술사는 발달해서 온갖 현란한 기법들이 난무한 작품들을 봐도 별 감흥이 없기 쉬운데, 1500년대 작품을 그 시대와 함께 이해하면서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는 것의 영향을 받는다.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중세 사람들이 보는 불타는 광경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불타는 광경과 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불에 타서 재만 남고 모든 것이 다 소멸되는 시각적 정경과 불에 덴 고통의 체험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는 방식에 대하여> 중에서, 존 버거


존 버거의 말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같은 불타는 장면을 본다고 해도 중세인과 현대인이 보는 것은 다르다.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다빈치 시대 사람의 시선을 빌려보자. 완벽히 르네상스 시대에 도착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현대인 시점은 벗어나보자.


곰브리치는 이 그림을 새롭게 바라보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이 신비롭다고 했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다빈치가 어떻게 이 그림이 사람에 눈에 비칠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과학자의 태도로 기록해 온 수많은 노트에서 연구해 왔다. 다빈치는 오직 그림만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 이 작품이 사람의 눈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꿰뚫고 있었다. 당연히 자연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옮기는 것을 목표로 삼아온 기존의 화가들과는 출발선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추구해 온 과학적 철학적 미술적 모든 세계관들이 담겨있는 셈이다.


우선, 그때까지 잘 나간다는 화가들이 그린 인물화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Screenshot 2025-07-21 at 16.07.00.JPG <The Arnolfini Portrait,1434 > 중 일부, 반 아이크

당시 가장 현실적 초상화를 그렸다는 네덜란드 화가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중에서 인물 부분만 보면,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가.

보티첼리.JPG <비너스의 탄생, 1485> 중에서, 보티첼리

르네상스 전기의 스타 보티첼리의 그 유명한 작품 <비너스의 탄생>에서도 빈스의 인물 부분을 보자. 매끄럽고 유려하게 표현된 미술사에 남을 아름다운 얼굴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위의 두 얼굴들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는가?


이탈리아의 '콰트로첸토' 거장들의 예술작품에는 한같이 인물들이 어딘가 딱딱하고 거칠어서 나무로 만든 것같이 보인다... 그들이 재현한 자연은 장대하고 인상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물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조각상들 같이 보인다. 아마도 그렇게 된 이유는 한 인물은 선은 선대로. 세부는 세부대로 성실하게 모사하면 모사할수록 그 인물이 실제로 움직이고 숨 쉰다고 상상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화가가 갑자기 마법을 걸어서 <잠자는 숲 속의 미녀>라는 동화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영원히 돌로 굳어 버리게 만든 것과 같다.

-<서양미술사> 중에서, 곰브로비치


위의 두 작품 모두 미술사의 큰 획을 그은 명작들임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식과 기술을 섭렵했던 대가들이었으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수많은 화가들이 이를 해결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진정한 해결책을 발견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모나리자.JPG <모나리자, 1502>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콰트로첸토 시대의 명작들을 보다가, 다빈치의 인물화를 보면 어땠을까. 곰브로비치가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 했던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다빈치는 어떻게 이 숙제를 풀었을까. 눈에 띄는 큰 차이는 일단 윤곽선을 흐릿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듯이 약간 희미하게 윤곽선을 남김으로써 자신만의 발명기법이라 할 수 있는 '스푸마토(sfumato)'기법을 썼다. 여기에 그는 사람의 눈매와 입가가 주는 분위기를 표현해 냈다.


얼굴을 그리건 낙서를 해본 사람이라면 우리가 표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주로 두 가지 요소,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둔 부분들이 바로 입과 눈 부분이다. 모나리자가 어떤 기분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은 늘 붙잡을 수가 없다. 물론 이러한 효과를 내게 하는 것은 이러한 모호함 뿐만은 아니다. 그 뒤에는 더 많은 것들이 숨겨있다. 레오나르도는 그와 같이 완벽한 솜씨를 가진 대가가 아니면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그런 대담한 일을 해냈다.

-<서양미술사> 중에서, 곰브리치

당대의 주류가 되는 작품들이 명화의 전당에 올려지고 있을 때, 흔히 그렇듯 수많은 아류들이 스타를 따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빈치의 진면모는 앞에서 계속 이야기했듯이 자연의 법칙들을 지식인의 권위에 의지하기보다 직접 실험하고 만져보면서 지식을 익힌 그 독창적인 태도에 있었다. 그런 태도는 자연스럽게 숙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드러났을 것이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놀라운 것은 그 작품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려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그러니까 100% 독창적이었다는 평가였다. 요즘 흔히 창작에서도 기존의 80%를 남겨두고 새로운 것 20% 정도 시도를 해야 받아들여진다고들 한다. 한 발짝 앞서지 말고 반발짝 앞서야 힘들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다빈치는 대담하게 자신의 방식을 선보였다. <모나리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아있는 인물로 표현한 그만의 방식 외에도 배경으로 보이는 길을 배치한 것도 엄청난 의도가 있다. 손모양, 옷주름 뭐 하나 기존의 방식을 답습한 것이 없다.(곰브로비치는 '환상적인 풍경화'라고 썼는데 그 비밀은 책으로 직접 확인하시길. 너무 길어서 중략합니다)


그는 더 이상 자연의 충실한 노예가 아니었다. 아득한 옛날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초상화를 보았다. 왜냐하면 미술가가 형상을 보존함으로써 그가 묘사한 사람의 영혼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위대한 과학자인 레온르도는 태초의 형상 제작자들의 꿈과 두려움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는 마술 붓으로 색채 속에 생명을 불어넣는 주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서양미술사> 중에서, 곰브로비치


다빈치의 그림이 그의 방대한 과학적 지식과 연구와 기술로 점철된 종합선물세트였다면, 작품이 이 정도의 감동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지식 자랑 혹은 실험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던 자연으로부터 대담한 이탈과 조화를 이루어 완성된 것이었다. 어느 한쪽에 매몰되지 않는 균형감각이 놀랍다.


여러 세세한 기법들이 향해가고 있는 다빈치 그림의 커다란 맥락을 곰브로비치는 이렇게 요약한다.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상상할 거리를 남겨두어야 한다.'


언젠가 들었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롭게'

선명하고 뚜렷한 것은 어쩐지 1차원적이다. 다 알지 못하고 모호한 것들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다음 편은 다빈치의 이단자적 태도에 대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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