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에게 음악이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음악에 기대어 사는 사람.'
한때 자주 가던 카페의 소셜미디어 계정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동네의 골목 눈에 띄지 않는 모퉁이에 있던 그곳은 그림 그리는 작업실 한쪽을 카페로 만든 공간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고개를 돌리면 칸막이 너머로 그리다 만 유화 캔버스가 보이곤 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찻잔 사이로 보면 다른 세계의 커튼을 엿보는 듯 신비로웠다.
종종 벽에는 직접 그린 그림들이 걸렸다. 구석의 동그란 나무 스툴엔 시집이나 소설들이 쌓여있었다. 한 번쯤 보고 싶었지만 진득하게 읽지 못했던 책들이 모인 책탑이었다. 언젠가 주문했던 커피엔 나무딸기향이 났다. 눈이 확 뜨이는 풍미에 몽롱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었다면 한두 번 가다가 말았을 것이다.
그 카페의 진가는 음악이었다. 주문대 옆에 놓여있는 오디오 시스템. 몇 개의 카세트테이프와 LP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있었고, 선곡은 언제나 기가 막혔다. 얼마나 좋은 턴테이블인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서 본 적이 있는데, 하이엔드 오디오 그런 거 아니었다. '인켈'이었다. 어릴 적 알았던 그 브랜드. 말 그대로 빈티지이다. 가끔 스스슥 붓질하는 소리가 들리면 혹시 방해가 될까 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 소리까지도 음악 같으니까.
그 카페 주인의 소개 글이 오랫동안 기억나는 것은 어떤 것을 들켜버린 기분 때문이다. 글쎄, 잘 모르겠다.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사랑한다고 하자니, 흔해 빠졌다. 그렇다고 기막힌 연주자라던가 음악을 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다. 취미를 물을 때 말하기도 애매하다. 누가 취미를 물었을 때 독서라고 답할 수가 없는 것처럼.
음악에 기댄다. 이건 조금 가까운 것 같다. 나의 일부에 부족한 무언가가 있어서 음악에 의지를 하고 기대게 된다. 자랑삼아 말할만한 것도 아니고, 어떤 면에서 별로 밝히고 싶지 않은 나약한 사람이라는 고백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부인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사실.
카프카는 음악을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 구원'이라고 했다. 파티장에서 떠들썩하게 즐기고 한바탕 시름을 잊는 그런 즐거움이라기보다는 고되고 힘든 일상 속에서 얻는 잠깐의 구원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친구 막스 브로트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다. 단순히 카프카의 글쓰기를 옹호한 친구가 아니라 음악을 통해 정서적 예술적 영역을 확장한 대화들이 오갔을 것이다. 또, <카프카와의 대화>를 쓴 쿠스타프 야누흐는 한 때 대중음악 작곡가로 활동했던 친구였다. 카프카 팬들에게 필독서로 꼽히는 이 책은 독자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대중음악 작곡가가 어떻게 카프카에 대한 책을 썼는가?
무엇보다도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에서 음악에 대한 그의 고백을 마주하게 된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는 장면이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어서 누이의 음악학교 학비를 댈 수 없다는 현실을 걱정한다. 정체성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가운데서 듣는 연주는 어떤 것인가. 그레고르를 향한 질문이 턱 목에 걸린다.
"음악이 그를 이토록 사로잡는데 그가 한낱 버러지란 말인가?"
쓸모 없어진 그레고르의 방에 가족들은 하숙생들을 들이고, 부엌에서 식사하는 그들 앞에서 여동생이 연주를 한다. 말로는 연주를 듣고 싶다 했지만 대단한 연주를 기대했다가 실망한 듯 듣는 척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고르는 이미 벌레가 된 몸을 감춰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었다. 하숙생들이 그 연주를 내버려 두고 있을 때 그는 서슴없이 기어 나온다. 악보를 좇아 바이올린을 켜는 동생의 음악 가까이 조심스레 다가간다. 그토록 조심해 왔던 다른 이의 시선이 모두 잊히는 시간이다.
마치 그리워하던, 미지의 양식에 이르는 길이 그에게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는 누이동생한테까지 나아가 누이의 치마를 당김으로써, 여기서는 그 누구도 자기처럼 연주를 들을 만한 자격이 없으니 바이올린을 들고 자기 방으로 좀 들어와 달라는 암시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누이가 들어오면 다시는 내보내지 않으리라, 적어도 자기가 살아 있는 한은.
-<변신>, 카프카
다른 인간들이 그 음악에 심드렁할 때, 그레고르는 그 소리에서 인간이었던 자신을 듣는다. 내가 지금 잃어버린 것,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그 세계를. 카프카가 기록했던 고통으로부터의 일시적 해방을.
비록 영원할 수 없다 해도 아직 그 세계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음악에 스스로를 내맡길 줄 아는데 그가 벌레란 말인가.
<카프카와의 대화>를 남긴 대중음악가 쿠스타프 야누흐는 프라하에서 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책을 써서 유명해진 인물이었지만, 그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은 이 책 때문이었다. 그는 카프카보다 스무 살이나 아래였다. 쿠스타프의 아버지가 카프카의 노동자재해보험국의 직장 동료였고, 늘 밤새워 글을 쓰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카프카에게 글을 보이게 해달라고 조른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스무 살의 장벽을 넘어 오랜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음악뿐 아니라 당대 정치, 철학, 사회와 예술, 신앙, 그리고 교회의 궁전까지 관심사를 넘나들며 대화를 나누었다. 음악적 코드가 맞는다는 것은 단순한 취향 이상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그렇게 여동생의 연주를 들으며 그레고르는 하나의 결심에 이른다.
그의 끔찍스러운 모습이 처음으로 쓰임새 있게 될지니, 자기 방의 문이란 문에는 동시에 다 가 있다가 공격하는 자들에게 맞서리라.
-< 변신>, 카프카
지독한 블랙 유머다. 끔찍한 벌레의 모습이 처음으로 쓸모가 있는 순간이 온다. 일의 압박, 가족의 생계, 가장의 의무 그 모든 고통이 그를 짓눌러도 모두 잊히는 순간이 있다. 그레고르는 음악 속에 온전히 머물기 위해 스스로를 이용하기로 한다. 누구라도 그 세계를 공격하는 자들에게 그는 저항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