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에 우리는

blur - End of a Century

by 베리티

<파이트클럽>을 극장에서 본 건 1999년이었다. 언제나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좋아해 왔다.

퀭한 눈빛의 헬레나 본 햄 카터와 에드워드 노튼이 다시 만난 그날, 빌딩 유리창 사이로 보이는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멍하니 TV를 따라 광고 이미지 속에 갇혀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매트릭스를 벗어나볼까 허우적대는 사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허물어진다. 그 위로 흘러나오는 Pixies의 'Where is my mind' 멜로디를 따라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흐릿해졌다. 무언가를 붙들고는 싶었는데, 어디에 그게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뭘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는 채 계속 주머니를 더듬는 기분.


'우리는 정말 이상한 때에 만났어 (You met me at a strange time in my life)'.

에드워드 노튼의 고백은 영화를 보는 20세기말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귓가를 때리던 사운드로 내내 멍하게 하는 영화 <트레인스포팅>도 있었다.

이기팝의 음악을 뒤로 질주하는 이완 맥그리거의 깡마른 실루엣을 따라 스코틀랜드의 막 나가는 루저들의 삶도 따라가 보았다. 삶에서 부딪히는 무수한 선택들 중 과연 어디까지가 내 뜻대로 되는 것인지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마약으로 혼란을 마비시키며 살아가는 청춘들의 일상이었고 내가 살고 있는 나라와는 별개의 이야기였지만, 그 무렵 홍대 클럽에서는 새벽까지 Underworld의 'Born Sleepy'가 울려 퍼졌다. 루 리드의 'Perfect day' 나지막한 읊조림 속에서 이완 맥그리거가 카펫 아래로 푹 꺼져가는 장면처럼 세상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락넘버를 주로 틀던 클럽들도 한 밤중에는 Prodigy를 내보냈다. 도깨비처럼 마구 날뛰던 프로디지의 무대에 객석은 핀이 나간 사람들처럼 열광했다. 점점 테크노의 기계적인 비트가 클럽들의 라운지를 채웠고, 사람들도 로봇처럼 움직였다. 일렬로 DJ를 향해 손을 올려 환호하는 풍경은 낯설었지만, 그것이 그즈음의 방식이었다.


요란하지 않게 극장으로 이끌던 영화 <중경삼림>도 있었다.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불안과 혼란이 가득했던 도시. 그곳에도 감정이 존재한다는 걸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을까. 금발의 마약밀매상 임청하와 실연을 애써 외면하고 있던 경찰관 금성무 사이, 네온 빛 가득한 좁다란 골목과 어두운 바는 동전을 넣으면 울리다가 사라지는 쥬크박스의 음악처럼 금방 사라지고 말 만남들이 스쳐갔다.

불빛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도시 한 켠의 호텔방에서 그들은 그저 같이 있어주었다. 긴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 큰 의미란 없다. 자고 있던 그녀의 발이 붓지 않도록 구두를 벗겨주고 슥슥 닦아주고 떠나는 뒷모습의 여운은 오래도록 남았다.

그렇다고 절망이나 외로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홍콩의 좁은 아파트에서 경찰관 양조위는 자신의 집을 몰래 오가던 왕비의 쥐가 난 다리를 풀어주고 있었다. 두 사람 역시, 서로의 사연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위를 맴돌게 된 우연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왕비가 항상 듣던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이나 크랜베리스의 'dreams'는 그들의 언어였다. 윙윙대고 시끄러운 그 음악은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쓸데없는 잡음을 차단하고 싶은 마음을 대변했다. 조금만 더 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무언가가 달라질 것 같았는데, 그건 그렇게 쉽게 잡히는 세계는 아니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왜 이 영화를 좋아하는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나를 모두 던져버리는 익숙한 연애의 클리셰보다 내게 더 다가왔던 그 시기의 현실은 만남 사이 반복되던 이유를 알 수 없는 엇갈림이었다. 그 무렵 내 주변은 그런 만남들이 빈번했다. 훅 빠져들었다가 쨍하고 깨져버리는 원숙한 결별이라기보다는 서로의 주변을 맴도는 행성과 위성처럼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만남의 연속이었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법을 몰라서 헤매던 시절이었다. <중경삼림>은 그 시절 그 혼란과 감정들을 알아주었다. 로맨스 영화의 걸작들은 차고 넘치겠지만, 그런 방식으로 위로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고 오래도록 왕가위 감독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블러 역시 <parklife> 앨범에서 세기말을 노래했다.

블러는 <파이트 클럽>이나 <트레인스포팅>, 혹은 프로디지 같은 강력한 펀치를 날리지는 않았다. 정신을 얼얼하게 하던 그들의 훅 역시 세기말의 방식을 공유하는 각각의 스타일이었고 우리는 충분히 소비했다. 세기말에 20대를 보내는 건 처음이었고 조금 낯선 일이었지만, 시간은 평소와 다름없는 속도로 흘러갔다. 각종 지구멸망 시나리오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니 밀레니엄버그니 세상이 바뀔 것처럼 떠들썩했던 뉴스와 보도들도 모두 그 시대를 추억하는 해프닝으로 남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의 스칼렛 오하라의 말은 그래서 명대사가 되었을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21세기의 태양은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랐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21세기 들어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다시 한번 웃을 수 있었다.

이 노래의 마지막 가사야말로 그 시절 진짜 우리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으니까.


blur -end of a century

https://www.youtube.com/watch?v=rVNCpCy8gLc

노래 후반부의 스테이지 다이빙이 그림 같다


"End of a century, oh, it's nothing special!" - blur

세기의 끝에, 특별할 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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