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 2집 <Modern life is rubbish>가 말해주는 것
세탁소를 하는 그녀의 삶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미납 고지서는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남편과는 이혼 직전이며 하나밖에 없는 딸은 반항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2022년 나만의 '올해의 영화'라고 외치기엔 이미 아카데미상까지 타버린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의 주인공 에블린의 이야기다. 어느 날 마주한 멀티버스의 세계에서 자신을 지켜내려는 고군분투 끝에 에블린은 삶의 민낯을 보게 된다.
"그 모든 거절과 그 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그래도 오늘에 충실한 삶을 살아온 덕분에, 삶은 그녀에게 진리의 빛을 살짝 비춘다.
"지금 당신의 모든 것이 엉망이기에 오히려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삶에서 다가오는 무수한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드러낸다. 블러 역시 그랬다.
1992년 블러는 파산 상태였다. 데뷔 앨범 <Leisure>가 상업적으로 반응을 얻기는 했지만, 대중적이라고 하기에는 호불호가 갈렸다. 블러가 추구했던 슈게이징* 스타일 음악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미국 투어에 나섰지만, 이미 미국은 막일꾼들이 입는 티셔츠를 걸친 그런지(grunge)**밴드가 대세였다. 같은 영국 출신으로는 '가장 새로운 영국 음악'이라는 수사 아래 스웨이드가 주목받고 있었고 블러가 서 있을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투어는 엉망이었고 멤버들 간의 사이도 좋을 리 없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매니저가 거액을 횡령하여 밴드는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모두 돈이 없어 집세도 내지 못한 것은 물론, 파산 신청을 고민할 지경이었다. 소속 레이블인 푸드레코드로부터의 압박은 커졌다. 다음 앨범은 무조건 흥행이 보장되어야 한다. there is no other way.***
이제, 막다른 골목에서 밴드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
트렌드를 받아들이고 적당히 타협하라는 요구가 거세졌다. 빚만 많고 여유가 없어지면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건 시간문제다. 제대로 된 판단이든 최선의 결정이든 어려워진다. 위험을 최소화하는 선택을 하기 쉽다.
하지만 블러는 오히려 모험을 했다. 당시 인기를 끌던 그런지에 대항할 수 있는 영국 음악을 하겠다고 나섰고 결국 레이블은 '이번 한 번만'이라는 말에 져주었다. 이렇게 해서 1993년 블러의 2집 <Modern Life is Rubbish>가 세상에 나왔다.
이 앨범이 없었더라면 이 정도로 블러를 좋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풍스러운 앨범 커버를 열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신세계가 열린다. 나 역시도 당시에 한창이던 너바나를 비롯한 그런지 밴드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 음악들은 거칠고 성난 사운드보다는 섬세하고 산뜻한 분위기였다. 1집 때부터 보였던 슈게이징의 흔적도 남겨두었고, 좀 더 멜로디 위주의 팝적인 감각이 돋보였다. 그렇다고 곱상한 샌님들 같은 음악인가 하면, 재기 발랄함과 장난기 가득한 캐릭터가 여지없이 드러난다.(이미 여러 TV쇼나 인터뷰에서 드러난 데이먼 알반의 똘끼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블러의 음악은 언제나 락과 팝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들린다.
'됐고! 난 그냥 내 갈 갈 갈래'
나에겐 이 앨범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들렸다.
기차는 폭주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증기기관차를 모델로 한 앨범커버처럼 블러는 영국 사회의 관찰자로서 이야기를 건넨다. 외국인으로서 영국 본토 사람들의 정서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런던을 걷는 네 명의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엿듣는 기분이었다. 앨범 제목부터가 지독히 시니컬하지만, 그들의 그런 불평과 투덜거림까지도 조금은 부러울 지경이었다.
똘끼로 밀어붙인 이 무모한 도전의 결과는 어땠을까?
영국에서는 차트 상위권에 진입하며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미국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맹위를 떨치고 있던 그런지 밴드들처럼 전 세계 차트의 문을 열기에는 여전히 힘이 부쳤다. 그렇다면 그냥 애송이밴드의 치기였을 뿐일까.
결국 블러의 선택은 브릿팝이라는 장르를 더 강화한 것이 되었다.
'브릿팝의 탄생'
'그런지의 지배에 대한 영국의 대답.'
언론의 해석은 그랬다.
블러의 기타리스트 그레이엄 콕슨은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
"브릿팝의 탄생에 대해 자랑했기보다는 우리는 그저 밴드로서의 삶을 위해 싸우고 있었을 뿐이다."
데이먼 알반은 킨크스(The Kinks)****에 대한 존경을 여러 차례 표했는데, 이 어려운 시기에 그는 킨크스를 붙들고 파고들었다. 1967년에 나온 킨크스 앨범 <Something else by the kinks>는 '60년대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던 히피즘을 거부하고 유행 타지 않는 엘리자베스 시대 팝의 걸작이 되었다. 아마도 블러는 킨크스의 방법론으로 '90년대 식으로 힌트를 얻은 것 아닐까. '90년대 당시 유행하던 그런지 대신 더욱 영국적인 음악을 찾는 방식으로 그 시대의 음악을 발견하는 것이다.
데이먼 알반은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을 좋아했지만(커트 코베인도 블러의 곡 There's no other way를 좋아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도 있다), 그런지 밴드에서 흔히 드러나는 자기혐오, 비관의 정서와는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데이먼 알반은 당시 NME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기운을 차려야 하고, 조금 더 활기차져야 해요. 지금 사람들은 히피처럼 돌아다니고 있어요"
그래서 이 앨범은 성공인가 실패일까?
발매 당시 영국 내 판매고는 겨우 4만 장 정도였지만, 밴드 멤버들은 긍정적이었다. 베이스기타 치는 알렉스는 말했다.
"<Modern life is Rubbish>는 우리가 성취하기 위해 시작한 것을 성취했기 때문에 성공적인 음반이었다"
성공을 말하려면 성공의 기준부터 정해야 하는데, 블러는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을 그 기준으로 삼았다. 음반 판매고로만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 앨범의 에너지는 블러를 본격적인 스타덤에 올려놓은 3집 앨범 <Parklife>의 씨앗이 되었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 해도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있고, 남들이 잘 몰라도 나는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이 차이를 만든다. 스스로 그 잠재력을 보았고 어느새 자신감이 된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에도, 남들이 좋다는 것에 휩쓸리지 않고 내 방식으로 해낼 수 있다는 것.
블러 앨범의 프로듀서 스티븐 스트리트가 이 앨범의 성공을 이렇게 정리해준다.
"<Parklife>와 <Modern life is rubbish> 사이의 공백이 짧은 편이었습니다. 환영받기 시작한 밴드는 활기를 되찾았죠. <Modern life is rubbish> 앨범이 잘 팔린 건 아닌데 평단의 반응이 좋았고 팬들의 긍정적인 반응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밴드는 다음 앨범으로 나아가기 위한 좋은 길을 찾았다고 느꼈죠."
그렇게 블러의 스타일은 시작되었다.
*슈게이징(Shoegazing) : 1980년대 말 영국에서 등장한 음악적 장르로 기타 이펙트를 많이 사용하며 노랫소리가 노이즈에 묻혀 뚜렷이 들리지 않는 특징을 보여준다. '슈게이징'이라는 말은 이를 추구하는 밴드들이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며 연주하는 특징을 보여서 붙여진 것.
**그런지(Grunge) 밴드: '90년대 초중반 미국 시애틀에서 시작되어 '시애틀 사운드'로도 불리며 락 씬을 주도하던 얼터너티브 락을 선보이는 밴드.
***There's no other way : 블러 1집 앨범 <Leisure>의 수록곡.
****킨크스(The Kinks): 가장 영향력 있는 1960년대 영국 락밴드 중 하나로 미국 시장에서도 성공하여 1965년 브리티시 인베이젼의 주인공으로 평가된다. 넓은 장르에서 영향을 받았고 주변생활을 관찰하는 작곡 방식으로 영국인들의 삶을 음악으로 드러냈다.
<Modern life is Rubbish> 앨범 중 한 곡, blur - blue jeans.
https://www.youtube.com/watch?v=SgCcvGFEBF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