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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김밥 Apr 17. 2022

장애인 시위는 비문명적?

박경석-이준석 토론 후기

“제가 비문명(이라고 주장하는)인 건 이겁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 누군가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책에 불만이 있어 가지고 예를 들어서 ‘조지부시가 무언가 했는데 마음에 안 든다’ 근데 그래서 그냥 그 조지부시랑 아무 상관없는 미국 사람을 보고 이 사람에게 목표를 전달하겠다 해가지고 여러 가지 투쟁을 한다고 그러면은 그건 굉장히 그건 비문명적인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힘들게 봤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박경석 공동대표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장애인 이동권 관련 토론(링크) 말이다.     


같은 당 김예지 의원이 경향신문과의 인터뷰(관련기사)에서 “숨 쉬는 것을 제3자가 토론거리로 삼아도 되나. ‘숨을 자유롭게 쉬고 싶다’는 내용이 과연 찬반 토론으로 가능한 얘기인가”고 밝혔던, 그 토론 말이다.    


 

김예지 의원의 비판. "숨 쉬는 것도 찬반 나눌 수 있나"


이준석 대표는 그 토론에서, 문명과 비문명을 정의했다. ‘국가의 정책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무 상관없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의 투쟁을 하는 것이 비문명’이라고.

  

문명은 무엇이고, 비문명은 무엇일까. 이준석 대표는 ‘문명과 비문명’을 이야기했지만, ‘문명’의 대척점에 있는 다른 단어도 있다. ‘야만’이다.


문명과 야만     


야만의 세계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계다. 뒤처지거나 약하면 도태되고, 빠르고 강한 종이 살아남는다. 그게 이 세계의 정의다. 하지만 인류가 이룩한, 그리고 지금도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문명사회’는 이 ‘야만’과는 결정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약자에 대한 존중’이다. 배제되었던 약자들, 소수자들을 ‘우리’(=주체적 시민)의 범주에 포함시켜 왔던 것, 그것이 바로 인류 문명사회 발전의 역사다.


인류는 ‘노예’를, ‘천민’을, ‘유색인종’을, ‘가난한 노동자’를, ‘여성’을, ‘이민자’를 계속 ‘우리’의 범주에 포함시켜가며 발전했다. 순간순간, 그리고 지역적으로 이 흐름이 역진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크게 보면 인류는 이렇게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인류는 이것이, 정의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경제가 어렵다고 ‘노예제’를 부활시키면, ‘이민자’를 쫓아내면 경제가 고도성장을 할 수 있을까?) GDP의 크기가, 일류기업의 개수가 결정적인 기준이 아니다.


이게 '문명'이 아니라고!


생각해보자. ‘이동권’은 사람에게 아주 결정적인 기본권이다. 이동권이 제약되면 교육 받기도, 취업하기도 어렵다. 사람구실을 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 기본권을 달라고 20년을 외쳤는데도 아직 장애인의 이동권은 심각하게 제약되어 있다. 장애인은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에게 이 사회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계다. 이것이야말로 ‘야만’이고, ‘비문명’ 아닌가? 그래서 그들이 그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욕을 먹어가며 투쟁해야 하는 이 사회야말로 ‘야만’ 아닌가? 상황이 이런데도 화살을 ‘장애인 시위’에 돌리며 ‘비문명적’이라며 공격하는 행태야말로 ‘비문명적 행태’가 아닌가?


장애인 시위 방식이 과격하고 급진적인가? 장애인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는 이 사회가 과격하고 급진적이라는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인가? 보라.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장애인 배제적’인지를. 이게 비문명이고, 이게 야만이다. 문명인이라면 이 야만에 분노해야 한다.


적자생존. 인간사회가 이렇게 돌아간다면 정글의 세계와 다를 것이 없다.


야만에 분노하자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가? 그래서 ‘비용절감’을 위해 ‘비장애인 위주’의 교통시스템을 구축해왔다면, 지금까지 ‘장애인의 희생’ 아래 한국사회가 ‘비용절감’이라는 ‘혜택’을 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장애인을 희생양삼아’ 발전해온 것이고. ‘시민을 볼모로 잡지 말라’고?(장애인도 시민인데.)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장애인을 희생양삼아 발전해온 과정은 쏙 빼고?


박권일 평론가의 지적을 살펴보자(관련기사).


“놀랍게도, 장애인은 이동의 자유가 있는 헌법상 시민이다! 국가는 시민 권리를 보장할 의무를 지니며, 못 할 경우 시민은 최대한의 수단을 동원해 요구하고 항의할 수 있다”.


국가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 국민에는 당연히 ‘장애인’도 포함된다. 국가가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는 것은 ‘시혜’나 ‘혜택’이 아니라, ‘의무’다.      


한 가지 제안     


마지막으로, 그래도 장애인의 시위가 불편하다면, 이런 시위를 막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선거제도의 비례성 강화를 통해 다양한 정치세력이 원내에 진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장애인의 이익을 적극 대변하는 정당이 원내에 진출하여 열심히 의정활동을 하면, 장애인들이 굳이 거리로 나와야 하는 상황도 일부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양당 중심으로 고착화된 한국정치에 역사적 분기점을 마련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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