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막지 말라
2016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 열풍’이 불었다. ‘갑자기’ 떠오른 후보라고는 하지만, 버니 샌더스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상위 1%에게 집중되는 부’를 늘 문제 삼으면서.
“샌더스는 항상 똑같은 이야기를 해온 사람이다. 30대 때 하던 빈곤과 불평등 얘기, 40대, 50대에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오죽하면 선거에서 만난 상대가 “저치는 맨날 똑같은 소리만 한다”고 짜증을 냈을까. ... 그렇게 그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 박권일, “샌더스라는 ‘손가락’, 아니 아니 주먹 말고”
‘주변부 정치인’ 샌더스를 중앙정치로 소환한 것은 바로 ‘사회경제적 상황’이었다. 극심해지는 양극화, 규제받지 않는 거대금융자본의 횡포로 미국 중산층의 기반이 흔들리던 그 상황이 ‘샌더스 열풍’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한국에도 이러한 정치인이 있었다. 노무현이다. 그가 하던 ‘맨날 똑같은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지역감정 해소’와 ‘동서화합’이었다. 특정지역에 특정정당의 깃발만 꽂으면 당선이 보장되는 처참한 한국정치의 현실에 맞선 그는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그는 2002 대통령 경선에서도, 본선에서도 그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그리고 당선되었다. ‘한국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유권자들의 ‘현실인식’이 ‘만년 꼴찌후보’ 노무현을 ‘대통령 노무현’으로 소환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 가치를 위해 고민했다. 그 고민에서 나온 것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연정 제안’이었다.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지면 총리를 국회의 다수연합이 추천하게 하고 내각을 지휘할 실질적 권한을 주는 것이다. 거저 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식 국회의원 선거제도 또는 중대선거구제로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을 조건으로 하려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정치를 지역구도가 아닌 정책구도로 재편하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만약 이렇게만 된다면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적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노무현, <운명이다>
오른쪽에서는 그를 ‘정략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며 의심했고, 왼쪽에서는 ‘어떻게 한나라당에 손을 내밀 수 있느냐’, ‘역시 참여정부는 진보정당보다 보수정당에 더욱 친화적이다’라며 비판했지만, 그렇게 쉽게 매도할 일이 아니었다.
‘우리 정치를 지역구도가 아닌 정책구도로 재편하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기 위한 고민이었고,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적 진보’를 이루기 위한 구상이었다. ‘뜬금없는’ 제안이 아니라, 그가 항상 해오던 ‘똑같은 소리’, 즉 ‘지역감정 해소’와 ‘동서화합’의 ‘노무현 가치’를 다시 한 번 표현한 것이다.
두 거대정당이 뜻을 함께하며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뭉개버린 이 시점에서, 노무현을 수없이 낙선시켰고, 또 대통령으로까지 만들어주었던 ‘노무현 가치’를 다시 생각해본다. 강자에게 유리하고 약자에게 불리하며, 유권자 투표수의 절반이 사표가 되는 ‘한국정치의 현실’을 생각해본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연정’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미숙했지, 적어도 영악하지는 않았다. 한국정치발전을 위해 자신의 권력도 내놓고자 했다. ‘수구 기득권 정당’ 자유한국당에 대한 기대는 없지만, 적어도 민주당은 달라야 하는 것 아닐까. ‘한 번 권력 잡는 것’보다, ‘한국정치의 건강한 토양’을 가꾸는 일에 더 힘써야 하는 것 아닐까. ‘노무현’을 배출한 정당이라면 말이다. ‘더불어’민주당이라면 말이다.
“모든 지역에서 정치적 경쟁이 이루어지고 소수파가 생존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 나는 지금도 여전히,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이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 발전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독일식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제일 좋겠지만”
- 노무현, <운명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소수파가 생존할 수 있는’ 좋은 제도이며, 독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도, 후보 시절의 문재인 대통령도 ‘독일식’을 언급했다. 그 민주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막고 있다니, 결국 민주당도 선거제도의 측면에서는 ‘청산되어야 할 기득권 세력’은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들 지경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시대를 앞서갔으나’, 민주당은 ‘시대에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노무현의 꿈을 민주당의 욕망이 막고 있는 것인가. 산타 할아버지가 알 듯, 유권자들도 안다. ‘누가 기득권세력인지, 누가 개혁세력인지’. 민주당은 지금이라도 입장을 바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