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대기자님, 이들을 '빨갱이'라 불러주십시오
김순덕 대기자님, 안녕하세요.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를 들으시고는 놀라서 글을 쓰셨더군요.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르지 못하는 나라>라는 글을요.(전문) “빨갱이를 빨갱이라 비판한 보수우파는 친일파로 몰릴 판”이며,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를 수 없는 나라는 북한과 다름없는 전체주의 국가”라는 비판까지. 기자님의 글을 보고 저도 놀라 이렇게 글을 씁니다.
기자님, ‘빨갱이’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북한의 지령을 받고 활동한 자들’인가요? 보수우파가 ‘빨갱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에 대해 알아봐야겠군요. 과연 보수우파는 ‘빨갱이를 빨갱이라 비판’했을까요?
1959년 7월 31일, 한 진보적 정치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됩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이었습니다. 그의 혐의는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국가 변란’과 ‘간첩 혐의’. 그렇게 사형장에서 스러져간 그를 향해, 52년 뒤의 사법부는 ‘무죄’를 선고합니다. 판결문에는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이 대한민국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고, “피고인은 ...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해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졌다며 그를 높게 평가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는 ‘빨갱이’가 아니었습니다.
‘빨갱이’가 아닌데도, ‘빨갱이’낙인을 찍었던 사례가 또 있습니다. 1964년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합니다. ‘인혁당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북괴의 지령을 받았다는’ 그들에게, 50년 뒤의 사법부는 또 다시 ‘무죄’를 선고합니다. 그들 또한 ‘빨갱이’가 아니었던 겁니다.
우리 역사의 질곡은,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르지 못하는 데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빨갱이가 아닌데도 빨갱이로 몰아 낙인찍고 매도하는 저열함’에서 온 것이죠. 심지어 국가는, ‘그들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도 빨갱이로 몰아 세웠습니다. 보수우파가 ‘빨갱이를 빨갱이라 비판’했다고요?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아, 제가 ‘빨갱이’의 의미를 너무 협소하게 규정했나요? 그렇다면 ‘빨갱이’의 의미를 더 넓혀야겠군요.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북한을 고무·찬양하는 자’가 빨갱이인가요? 충분히 적절한 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 손가락질을 받았으니까요. 이런 사람들 중에는 누가 있을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바로 전두환 전 대통령입니다. 그는 김일성 주석을 향해, “조국과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모든 충정을 바쳐 이 땅의 평화 정착을 위해 애쓰신 데 대해, 이념과 체제를 떠나 한민족의 동지적 차원에서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며 그를 칭송했습니다. 이렇게나 낯 뜨거운 찬사라니요!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르지 못하는 나라’가 걱정되십니까? 전두환씨를 ‘빨갱이’라 불러주십시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사실 이 대열에서 빼놓기 아까운 분입니다. 이 분은 2002년 유럽-코리아재단이사의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합니다. 그녀는 북한 사회를 보고 “우리보다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듯 보였다”고 밝혔습니다. 북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분의 방북기를 더 들여다보면 점입가경입니다. “(김정일 위원장과) 첫 만남이라고 하지만 (선친들간에) 과거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모든 것을 탁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수 있었다”. 보수우파라면, 기자님, 이 분도 ‘빨갱이’라 불러주십시오.
문재인 정부를 향해 “반대할 자유가 없는 김씨 왕조의 북한과는 평화 공존을 강조”한다며 비판하셨지요? 당시 박근혜 이사는 방북 후, 국내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화를 하려고 마주 앉아서 (북한) 인권이 어떻고 하면 거기서 (회담이) 다 끝나는 것 아니냐”고 밝혔습니다. 맞습니다. 인권과 민주주의, 김정일 위원장 앞에서 말씀 못하신 거지요. 이 분도 ‘빨갱이’라 비판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기자님께서 몸담고 계신 <동아일보> 이야기도 해야겠군요. 1998년 10월 동아일보사 취재단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의 '보천보 전투'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를 담은 금동판을 선물했다는 사실, 알고 계실 겁니다. 더구나, 박근혜 당시 유럽-코리아재단 이사가 방북했을 당시, <동아일보>는 그녀를 ‘빨갱이’라 비난하기는커녕, <평양 만찬장의 박근혜 의원>이라는 사설을 통해 그의 ‘행보가 주목을 끌고 있다’며, 그녀가 ‘서울에 돌아와 어떤 언행을 보여줄 것인지 주목된다’며 이 방북에 대해 기대감을 내비쳤습니다.(관련기사) 이 때는 왜 ‘빨갱이를 빨갱이라’ 하지 못하셨습니까.
그리고 하나 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김정은 위원장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빨갱이가 어디있습니까. 이번 2차회담은 결렬되었지만, 대화를 향한 의지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빨갱이’라 비난해 주십시오.
기자님의 ‘빨갱이’잣대는, 누구에게는 엄격하게 적용되고, 누구에게는 느슨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닌지요? 바로 그겁니다. 그 이중잣대가 우리 역사를, 정치지형을 심각하게 왜곡시켰습니다. 이제 부디 그 빨간색 색안경을 거두시길 바랍니다.
“‘민주당 50년 집권론’이 핵을 쥔 35세의 김정은과 더불어 자유 없는 평화로 가겠다는 것인지 눈을 부릅뜰 일”이라고 하셨지요?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르지 못하는’ 이 나라를 통탄해하신 기자님께서, 트럼프 대통령을, 박근혜 전 대통령을, 그리고 <동아일보>를 ‘빨갱이’라 할 수 있을지 눈을 부릅뜰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