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을 잡을 것이냐, 진실을 잡을 것이냐
2009년 3월, 한 여배우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의 피해사례(접대)를 적은 문건을 남기고. 여러 인물들이 조사를 받았으나, 대부분 무혐의 처리되었으며 사건의 진상 또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여러 의문을 남긴 채 잠들어 있던 이 사건은, 법무부 검찰과거사위가 사건 발생 9년 만에 재조사를 결정(2018년 4월)하면서 반전의 기회를 맞게 된다.(관련기사)
그리고, 2019년 3월 5일, 배우 장자연의 사망 10주기(3월 7일)를 앞두고, 중요한 증언자가 세상에 등장한다.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고, <13번째 증언>이라는 책과 함께. 장자연의 동료 배우 윤지오였다.(3월 5일, <김어준의 뉴스공장> 인터뷰)
오히려 가해자들이 너무 떳떳하게 사는 걸 보면서 좀 억울하다는 심정이 많이 들었던 게 사실인 것 같아요
– 윤지오, 2019.3.5. <김어준의 뉴스공장> 인터뷰에서.
가해자들이 떳떳하게 사는 세상이 억울해, 갖은 위험과 부담을 무릅쓰고 나온 그녀에게 언론과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3월 7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관련기사)와 <SBS8뉴스> 인터뷰(관련기사)에, 3월 18일 <MBC 뉴스데스크> 인터뷰(관련기사), 3월 29일 KBS <거리의 만찬> 출연, 4월 11일 JTBC <뉴스룸> 인터뷰(관련기사) 등 국내 주요 언론사가 앞다퉈 그녀를 불렀다.
3월 1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장자연 사건 재수사 기간 연장’을 청원하는 국민청원이 등록되었고, 청와대 답변기준인 20만을 훌쩍 넘어 무려 73만여명이 해당 청원에 동의하는 기염을 토했다.(관련링크)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음해세력일까? 단지, 대형화된 이슈를 타고 자신의 이름을 과시하고 싶은 ‘관심종자’들의 억지주장일까? 이렇게 간단하게 치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마지막 두 장에는 이름이 쭉 나열돼 있었다.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였다. (중략)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B성의 세 사람이 이름이 연달아 적혀 있던 부분이다. (중략)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고 족히 40~50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리스트까지 포함해 내가 읽은 문건은 모두 7장의 사본이었다"
- <13번째 증언> 중
그녀는 책에서, ‘7장의 사본’과, 40~50명의 리스트를 봤다고 증언한다. (‘장자연 리스트’와 ‘접대 자리’에 대한 증언이 그녀의 핵심적인 증언이다) 그런데, 3월 7일 <김현정의 뉴스쇼>에서는 내용이 바뀐다.(관련기사)
“제가 기억하기로는 4장으로 기억을 하고요”
“원본이라고 하는 부분을 봤는데”
- 2019.3.7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 중
'7장의 사본'이, '4장의 원본'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SNS 라이브방송에서는 또 다른 내용을 주장한다.
“저 사본도 보고 원본도 보고 유가족분들이랑 같이 봤거든요?”
- SNS 라이브 개인방송 중
‘핵심적인 증언’ 중 하나인 ‘리스트’에 대한 증언이 일관적이지 못하다. 책의 주장, 인터뷰의 주장, 개인방송의 주장이 하나도 맞는 것이 없다. 13번이나 증언을 했다면 리스트에 대한 것도 여러 번 증언했을텐데, 이럴 수가 있는가.
이른바 ‘리스트’의 이름의 수는 어떨까? 그녀는 책에서 ‘40~50명’을 주장했지만, JTBC 뉴스룸에서는 ‘30여명’을 주장한다.
“제가 상대해야 될 분들은 A4용지 한 장이 넘어가는 거의 한 30명에 가까운, 공권력을 행사하실 수 있는 법 위에 선 분이시기 때문에..”
- 2019.4.11, JTBC <뉴스룸> 인터뷰 중
문건의 장수, 원본/사본의 여부, 해당 리스트에 대한 이름의 수 등 가장 기초적인 사실에 대한 증언조차 일관성이 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또 벌어진다.
3월 18일,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단 총괄팀장 김영희 변호사가 JTBC <뉴스룸>에 직접 출연한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말한다.
“그 당시에 어쨌든 국회의원이었고 윤지오 씨가 기억력이 좋은 분입니다. 얼굴도 잘 구별을 하고요. 그래서 정확히 기억을 해내서 저희가 깜짝 놀랐습니다”
- 김영희 변호사, JTBC <뉴스룸> 인터뷰 중
10여년 전의 상황을 ‘정확히’ 기억해내서, 진상조사단 사람들도 깜짝 놀라게 할만큼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그녀가, 리스트에 관한 진술이 오락가락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손석희, 이상호 등 여러 언론인들이 이를 전혀 묻지도, 문제 삼지도 않았던 것 또한 이해하기 힘들다.)
중요한 증언일수록 그 증언을 검증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더군다나 그 내용이 수시로 바뀐다면? 당연히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결국 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언론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노라면 한숨이 나온다.
‘알바를 풀었다’, ‘00일보과 동급이다’, ‘00일보나 캐봐라’ 등등.
댓글의 내용을 잘 보면, 왜 ‘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을 문제 삼는 기사가 이들에게 불편한지 알 수 있다. ‘윤지오 증언’이, 특정언론사와 그 사주일가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증언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 특정언론사를 단죄하기 힘들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오로지 ‘진실’이기 때문이다.일관성을 잃은 진술에 의지해 누군가를 단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밝히고 죄인들을 정확하게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장자연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핵심증언의 일관성과 신빙성은 반드시 검증되어야 한다. ‘정확한 진실’을 계속 찾아나가야 한다.
상대가 박근혜라 하더라도, MB라 하더라도, 그들이 신빙성 없는 진술에 의해 단죄된다면, 우리는 그 상황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정적을 잡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이건 좌-우,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보편적 상식과 합리에 관한 것이다.
우리사회가 정치색, 사상과 이념의 노선을 떠나, 진실과 합리적인 논리로 이 사건을 대할 수 있을까. 이 사건의 해결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판단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무쪼록, 사건의 진상이 밝히 규명되기를 바란다.(물론, 무지하게 힘들 것 같기는 하다)
그녀가, 김 작가와의 채팅에서 밝혔듯이.
사건은 종결자체가 불가능(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