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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 Sep 24. 2015

Oh, my Malaysia

Yes, I'm good to go (02_ 짧지만 직장인이다)

#02_ 짧지만 직장인이다.




[Metrojaya 백화점 본사 모습. 일반 맨션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수영장은 매일 물이 채워져 있지만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다]



첫 출근이라 긴장한 탓일까. 9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혹시나 늦을까 7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라 제법 싸늘하게 느꼈다. '말레이시아도, 하루 종일 더운 건 아닌가 보네' 했지만, 8시가 조금 지나자 사무실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화장이 땀에 지워졌다.



7시 30분은 너무 이른 출발이었다. 회사에 도착하니, 한 두명을 제외하곤 출근한 사람이 없었다. 30분 쯤 뻘쭘히 앉아 기다리니 담당자가 왔고, 업무를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한 면담을 시작했다.

내 보스(boss)는 알빈(Alvin)이다. 인사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람(Assist Manager)인데, 채용과 승진, 발령 업무를 담당한다. 그리고 나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전공이 경제인데 왜 백화점에 지원했냐는 물음에 '한국에 있을 때 부터 백화점이 어떻게 운영되는 지 궁금했고, 또 어릴 때 부터 백화점에서 일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경험은 진로 계획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했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찾아왔네. 4개월 동안, 백화점의 모든 것을 경험하게 해주지"


갑자기 무서워졌다. 알빈은 1달 간격으로 나를 다른 부서에 배치해 주겠다고 했다. 원하는 부서 4 곳을 정해보라고 해서 HR, Merchandising, Marketing, Finance를 골랐는데, 이 중 Merchandising과 Finance는 인턴들의 선례를 보니 워낙 전문적인 업무라 인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고-배울 수 있는 것이 한정돼서- 그 외의 다른 부서로 배치해주겠다고 했다. 



첫번째로 네가 배울만한 업무가 있고, 두번째로 그 업무를 네게 잘 가르쳐 줄 수있는 사람이 있는지를 볼거야



알빈이 오늘 하루는 HR에서 업무 보조를 하라고 했다. 정식으로 배치될 부서를 찾기 위해 각 부장들과 협의를 해야한다고 설명했다. 



"오늘은 HR에서 업무 보조를 하도록 해. 네 첫 부서는 부장들과 이야기 해 보도록 하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마. 첫번째로 네가 배울만한 업무가 있고, 두번째로 그 업무를 네게 잘 가르쳐 줄 수있는 사람이 있는지를 볼거니까."



아. 신은 한국인임이 분명했다. 겨우(?) 인턴을 이렇게 배려해 주는 상사가 어디에 있을까. 알빈의 말을 듣는 순간, 이 백화점에 지원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턴 기간 동안, 일 하나는 제대로 배우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1시간 쯤 지나자 내게도 '업무'가 생겼다. 오늘 업무는 총 2가지. 첫 번 째는 보너스를 받는 직원들의 지급 자격 조건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보너스의 종류는 2가지다. 업무시간을 잘 지킨 것과 건강이다. 그러니까, 개근을 하면 2가지의 상을 다 받을 수 있다. 1달간 지각과 결석이 없으면 5RM, 아파서 조퇴한 것이 없으면 또 5RM을 받는다. 직원들의 출근부를 보고 자격조건에 어긋나는 것이 없었는지 확인하는 것이 나의 첫 업무였다. 만약 어긋나는 사항이 있다면 가차없이 보너스 상품권을 뜯어냈다. 마치 내가 스크루지 고용주 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업무는 출근부 정리였다. 백화점 현장에서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의 출근부를 월 별로 모아 파일링을 하는 것이다. 백화점의 규모를 대변하 듯 한 달 분량만 해도 A4용지 1000장이 훌쩍 넘는다. 분량이 워낙 많아 파일에 엮지 못하고 따로 끈으로 묶어야 했다. 필요한 길이 만큼 눈대중으로 끈을 잘라 양 끝을 테이프로 감싸고 일면 'paper sewing'을 했다. 책상 옆으로 쌓인 어마어마한 분량에 지나 가던 동료들이 "다 할 수 있겠냐"고 묻자 나는 "Actually, I was born for this"라고 농담까지 던졌다.   



이 모든 일을 지시한 것은 내 일일 사수인 '앙툰'이다. 36살의 무슬림 여성인 앙툰은 벌써 4명의 자녀가 있는데 첫째가 벌써 15살이란다. 자녀들이 '런닝맨'을 좋아해 한국 연예인들을 제법 아는 듯 했다. 앙툰은 매우 친절하고 착하다. 본인의 지시사항을 곧바로 이해하면 '굉장하다'며 웃었고, 내게 건네준 과자가 '맛있다'고 하면 또 말레이시아의 것을 좋아한다며 웃었다. 점심 식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미리 내게 메뉴를 물어 함께 배달을 주문했다. 아직 말레이시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어떤 메뉴를 주문할 지 몰랐는데 부서 사람들이 "이건 먹어봤니?"하며 '오늘의 점심 메뉴'를 정해줬다. 내일 점심 때 먹을 메뉴도 미리 정했다. 당분간 메뉴 걱정은 없겠다 싶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배달 온 음식을 가지고 수영장 옆 파라솔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는 말레이시아 음식에 제법 잘 적응했는데, 한국인이 말레이시아 음식을 먹는 것이 신기했는지 한참을 쳐다봤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인사과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인사과라 많은 사람이 오가는구나'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앙툰이 급하게 나를 찾았다. 


"얘가 한국에서 온 Jehee야. Jehee, 모두들 네가 궁금해서 왔어."


"저를요? 왜요?" 

'아, 새로운 사람이 오면 다 이렇게 와서 반겨주는구나. 참 가족같은 회사구나' 싶었다.


"외국인 인턴이 처음이고, 게다가 너는 한국에서 왔잖아."


"나 한국인 처음 봐! 너무 신기해. 내가 한국인과 같이 일 하다니."하고 격한 반응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아, 내가 한국사람이라서.' 그렇다. 말레이시아는 한국에서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엄청난 한류 열풍이 불고 있다. 번화가에 가면 팝송 혹은 K-pop밖에 들리지 않고, 점심시간에 내 옆 동료는 스마트폰으로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다. 옷가게에 가면 직원이 내게 와 '한국사람이냐'하고 물었고, 그새 단골이 된 양고기 수제햄버거 레스토랑에서는 매니저가 '한국인 미녀 단골손님'이라며 갈 때마다 할인을 해줬다. 말로만 듣던 'Korean Premium'을 실감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나에게 '런닝맨'을 아냐고 물어봤고, 서울에 사는 지, 성형을 했는 지-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등등 많은 것을 물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모두들 각자의 부서로 돌아갔다. 부서 사람들이 "We have Metrojaya superstar"라며 놀렸다. 



오후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아버지께 사진 한 장이 왔다. 그래도 딸의 첫 출근을 기억하셨던 모양이다. 덩그러니 사진만 한 장 있길래 무언가 더 있으신가 싶어 기다렸지만, 사진 한 장 뿐이었다. 사진을 보니 편지였다. 메신저로 긴 글을 쓰기 귀찮으셨음이 분명했다. 컴퓨터로 작성한 편지를 출력해 그것을 사진을 찍어 보내셨다. "딸, 점심식사는 했니?"하시며 편지가 시작됐다.



 딸, 짧지만 직장인이다




"일을 하다보면 너의 선택에 책임을 지지만 어쩔 수 없는 변수가 수 없이 생긴단다. 너의 의지와 관계없이 말이다. 특히 돌발 변수는 그 동안 내가 쌓아 올린 것들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기도 하고 말이야. 그럴수록 네가 택한 역할에 방법에 책임을 져야함을 깨달아야 한단다. 그러면 후회가 기회가 되고 다음엔 좀 더 잘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긴단다. 실수했다고 기죽지 말고 이게 아닌데 하고 자책하지 말고 위기를 기회삼아 일어서는 용기와 마음가짐이 중요하단다. 딸, 짧지만 직장인이다. 너로 인해 내가 속한 조직이 손해봐서는 안됨을 명심하고 항상 나보다 조직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갖추도록 해라. 우리 딸은 아빠한테 하도 괴롭힘을 당해서 잘 견딜거야. 세상사는 모든 것들이 마음먹고 생각하기 나름이란다. 모처럼 아빠가 잔소리 한다. 보고싶은 딸내미, 사랑하는 딸내미, 힘내고 잘 하거라."  




이 편지를 몇 번이나 읽었을까. 특히나 "짧지만 직장인이다"라는 말은 마음에 자리잡아 수 없이 읊조리고 되뇌이기를 반복했다. 아빠이면서도 사회생활의 선배(?)로서 내게 주셨던 조언. 해외에서 일한다는 딸 걱정이 눈에 보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오후 업무에 집중했다. 단순한 업무 보조라 여겼지만, 이곳 저곳으로 심부름도 다니고, 전반적인 인사과 업무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시간은 전혀 느리게 가지 않았다. 



첫 출근날의 점수는 4.7/5 정도 되는 것 같다. 나머지 빈 자리는 나의 부족한 영어 실력 때문. 영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많이 못 했고, 내가 하려던 말고 제대로 나오지 않아 애먹었다. 그래도 회사 분위기가 매우 좋았고, 사람들도 내게 친절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주어 마음 편히 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일부터는 O&M(Operation and Management)부서에서 약 1달 간 근무하게 된다. 이 곳은 사내 업무 규정과 여러 내규를 담당하는 곳이라고 한다. 



"정성과 노력을 들이면 안 되는 것이 없더라"  


퇴근 길, 아버지께 전화해 첫 출근이 어땠는지에 대해 한 참을 수다떨었다. 상관을 매우 잘 만났다는 것과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 하나로 모든 회사 사람을 만났다는 것, 생각보다 영어가 잘 안나와 애먹은 것과 내일부터는 O&M에서 일하게 되는데 영어 때문에 걱정된다고 이야기 했다.  아버지는 "살아보니 정성과 노력을 들이면 안 되는 것이 없더라"고 말하셨다. 정확히 내게 필요했던 말이다. 아직 시작도 안 했고 정성도, 노력도 들이지 않았다. 엄살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첫 출근이 무사히 마친 것에 감사하며 긴장이 풀려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숙소로 왔다. 각자의 직장에서 벌어진 일들로 이야기 꽃이 피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나는 정말 '복 받은'사람이었다. 이제 내가 정성과 노력을 들이면 된다. 



잠자리에 들기 전, 다시 한 번 아버지의 편지를 읽었다. 과연 나는 4개월 동안 직장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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