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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적인튀김요리 May 22. 2022

와그작 피망 씹는 소리로

서른여덟 번째 책 <푸른파 피망>

<깔끔하게 꽂는 책꽂이>는 초등학생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작품을 선생님의 관점에서 읽고 소개합니다. 주변에 책이 재미없다는 이유로, 지루하다는 이유로 혹은 길거나 어렵다는 이유로 멀리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책을 권하고 함께 이야기하고 공감하며 천천히 그리고 끝까지 읽어보세요. 그러면 아이들은 분명, 그다음의 책을 스스로 찾아 나설 겁니다.



휴전협상을 하는 동안 전략적 요충지인 고지 쟁탈을 하기 위한 교착전을 기약 없이 벌이며 두 이념 사이에서 소모되어 버리는 인간들의 모습을 다룬 영화 <고지전>에서 인민군 중대장 역할을 맡은 류승룡은 "너무 오래돼서 싸우는 이유도 잊어버렸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그 이유는 잊어버린 채 우리 모두를 소모하는 전쟁만 거듭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자조적으로 드러낸 대사입니다. 영화 <고지전>은 전쟁이 가져오는 개인의 좌절을 잘 그려낸 영화이지만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하면서도 아픈 배경에서의 이념 갈등 속 인간 개개인이 겪는 처참함을 그린 영화이기에 아이들이 온전히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푸른파 피망>은 그런 영화 <고지전> 속 주제의식을 보다 쉽고 가볍고, 즐겁게 그려낸 책입니다.  

 

먼 미래, 푸른파 행성에는 각기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나'와 친구 '채은신지'도 각기 다른 행성에서 왔죠. 하지만 푸른파 행성에 어두운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푸른파 행성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입니다. 미래의 전쟁은 대기권 밖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푸른파 행성의 모습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나'와 채은신지만 봐도 그렇습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채은신지의 표정에는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말할 수 없다는 무언의 신호가 담겨 있죠. 분명, 전날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둘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전선이 생겼습니다. 더 이상 푸른파 행성에서 인간적, 물적 교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일어났으니까요. 전쟁이란 그렇습니다. 이념의 갈등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멀쩡했던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곤 합니다.


"나에게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채은신지의 표정이 바로 전쟁의 징후였다. '말 걸지 마. 나는 너랑 말하면 안 돼.'라고 쓰여 있는 듯한 얼굴. 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만으로 '왜?' 하고 물었다. 평소 같으면 "바보야, 그것도 모르니?" 하는 대답이 들렸어야 할 순간. 하지만 채은신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에게는 그게 바로 전쟁이었다.


계속되는 대기권 밖 전쟁으로 각 행성에서는 푸른파 행성으로 구호물품을 조달해줍니다. 그런데 식자재 배급에 차질이 생겼는지 '나'가 속해 있는 행성에서는 '고기'만 잔뜩 배달해주고 채은신지가 속해 있는 행성에서는 '야채와 과일'만 주야장천 배달됩니다. 고기만 먹는 사람들은 싱싱한 야채와 과일이 그립고 야채와 과일만 먹어야 하는 사람들은 기름진 고기가 그립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기, 야채와 과일을 한데 모아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지만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일어났으니까요. <푸른파 피망> 속 전쟁은 이렇듯 '음식'으로 표현됩니다. 고기와 야채, 일종의 부러움(?) 전쟁이죠. 서로가 잘난 부분만 선전하고 어려운 부분은 내색하지 않습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서로를 속이고 싫어해야만 하는 것이니까요. '나'와 채은신지도 망원경으로 서로를 놀리듯 식사 대전을 벌입니다. '나'는 기름진 고기로 채은신지는 과즙이 잔뜩 흐르는 과일로 말이죠. 어느새 둘도 전쟁에 익숙해진 모양입니다. 정작 전쟁의 이유는 모른 채 말이죠.


'나'와 채은신지는 전쟁이고 뭐고, 결국 음식의 유혹에 항복합니다. 맞교환을 하기로 한 것이죠. '나'는 채은신지에게 돼지고기를 채은신지는 '나'에게 피망과 아삭이고추를 줍니다. 그날 저녁 식당에는 '와작'하고 피망을 씹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집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피망을 향하고 귀는 '와작'하는 소리에 기웁니다. 결국, 어른들도 위가 시키는 대로, 혀가 이끄는 대로 항복합니다. 야채와 과일 그리고 고기를 서로 나누어 먹게 된 것이죠. 사실, 누군가 지금부터 '평화!'를 외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연스럽게 아주 우연한 일로 평화가 찾아오게 된 것이죠. 대기권 밖의 전쟁은 여전했지만, 푸른파 행성의 이유 모를 전쟁은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와작. 피망을 씹고 있는 건 나밖에 없었지만, 그 소리로 인해 모두의 머릿속에 잠자고 있던 피망의 맛과 식감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와작. 와작. 와작 와작 와작."



어른들이 그어놓은 혹은, 이념이 그어놓은 '전선'은 대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요? 전선은 내가 그은 것이 아닌데, 나의 삶은 완전히 뒤바꿔야만 합니다. 이야기를 나눠도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생기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과 절대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곳이 생기죠. <푸른파 피망>은 먼 미래, 푸른파 행성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나'가 채은신지에게 받아온 피망으로 평화를 되찾는 발랄하면서도 엉뚱한 이야기를 그린 SF소설이지만 우리나라 한국전쟁,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전쟁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느낍니다. 전쟁은 소수의 결정으로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만 결국 고통과 아픔, 피해는 고스란히 개개인이 당연하게 나누어 짊어져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왜 싸우는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싸우고 있는 영화 <고지전> 속 병사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피망' 같은 실마리가 불현듯 찾아와 갈등을 끊어내고 화합하고 대화하는 하나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개개인이 짊어져야만 했던 고통과 아픔, 피해를 다스리고 다시 행복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푸른파 행성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고기와 야채, 과일을 나누어 먹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비춰볼 때, <푸른파 피망>을 읽고서 한국전쟁에 대해 그리고 통일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열릴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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