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에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 (8)
영화 「마션」의 주인공 마크 와트니는 홀로 남게 된 화성에서 생존을 위해 온실을 짓는다. 식량을 생산하기 위한 수단이다. 여러 실패 끝에 온실이 지어지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온실은 제 기능을 해낸다. 그렇게 와트니는 화성이라는 외계의 공간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도 잠시, 사고로 인해 온실에서 귀하게 재배했던 감자들과 힘겹게 일군 밭은 바깥세상에 노출되며 일순간에 물거품이 된다(그리고 내뱉은 “씨발, 씨발!”은 정말이지 참담한 대사였…). 와트니의 좌절도 좌절이겠으나 범생명론적 차원(?)에서 들여다본다면, 일순간 죽음을 맞이한 감자들에게도 이건 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을 거다. 평생을 따뜻한 공간에서 귀하디 귀하게 자랐던 감자들이 맞이한 바깥세상은 이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을 차디찬 세상이었다.
온실이란 기후나 날씨, 계절, 재해 따위에 지배받지 않는 공간이다. 요구에 따라 더디 키울 수도 있고, 빠르게 키울 수도 있다. 온실 안에서 식물은 쉽게 자란다. 요새는 비닐하우스 같은 온실과 동시에, 스마트 팜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온실도 등장하고 있단다. 어쨌든 이렇게 쉽게 자라 밥상에 올라온 채소는 마치 참기름으로 코팅이라도 한 듯 반들거린다. 교실은 온실과도 같다. 교실은 잘 짜인 작은 사회다(왜,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여러 요구에 따라 더디 키울 수도 있고, 빠르게 키울 수도 있다. 교실 안의 어린이는 쉽게 자란다. 온실 속 식물처럼 기후나 날씨, 계절, 재해 따위의 물리적, 자연적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한 건 아니지만 정치적 문제, 시대적 문제, 세대·성별·종교 간 갈등 등의 사회적 환경으로부터는 꽤 안전한 편이다. 이렇게 자란 어린이는 반짝거린다. 이른바 온실 속의 화초가 되는 셈이다.
교실 안의 어린이는 가치를 명제로 배운다. 책임, 존중, 협동, 공감, 배려, 정직 등의 가치를 꽤 분명하게 배운다. 여러 가치를 교실 안에서 배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린이들은 대개 그러한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실에서는 가치가 충돌하는 4차원의 다면적, 다층적인 상황보다는 가치 단어 자체에 대한 해석과 해례와 같은 2차원적인 단편적 상황에서의 가치를 기본으로 가르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상대의 진심 어린 사과에는 용서로 답하라고 가르치지만, 세상의 용서가 어디 그리 쉬운가. 상대의 잘못된 말이나 행동에 용서를 베푸는 건, 상대의 사과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가 많다. 어떤 것으로도 용서되지 않을 장면도 더러 있다.
이렇듯, 교실에서 가르친 것들이 복잡한 교실 밖 세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알다시피, 사회는 다르다. 그러니까 사회는 (교실과는) 다르다. ‘사회는 달라! 이 녀석아.’라고 일갈하는 것도 이제 막 교실을 벗어난 사회 초년생들을 향한 조언(?)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처럼. 교실에서 배웠던 것처럼 낭만적이지는 않달까.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안전하게 짜인 교실에서 마냥 살 수 없는 어린이들이 마주해야 할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영화 「마션」 속 와트니가 귀하게 키워냈던 감자들이 일순간 날벼락같은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어린이들에게도 교실 바깥세상은 이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는 차디찬 세상이다.
그날은, 상추 겉절이가 급식 메뉴로 나온 날이었다. 어린이들이 교실에서 바삐 길러 수확한 상추를 급식실로 보낸 날이었고 어린이들이 수확한 상추로 상추 겉절이가 만들어져 배식이 되는 뜻깊은 날이었다. 어린이들은 점심시간을 기다리며 꽤 들뜬 모양이었다. 우리 학년은 전체 학년 중에서 가장 늦게 점심을 먹는 학년이었다. 협소한 급식실 탓에 3부제로 운영되는 급식의 마지막, 3부에 먹는 학년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배식이 끝나고 나면 급식실도 마무리 짓는 때가 된다. 상추 겉절이를 배식받으며, 어린이들은 자기가 수확한 상추 같다며 사방팔방에 자랑을 늘어놓았다.
평소엔 초록색엔 젓가락을 얼씬도 하지 않던 어린이들은 여러 번이나 상추 겉절이를 리필받기 위해 배식대로 향했다. 하지만 배식대에는 급식실 마무리로 일손이 빠져 있는 상태라, 비어 있기가 일쑤였고 추가 배식을 위해선 정리하던 일을 멈추고 배식대로 가야 했기에, 배식대를 자꾸 찾아오는 어린이들이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A는 상추 겉절이를 세 번째 받으러 가고 있었다. 급식실 선생님께서는 또 배식대를 찾아온 A를 바라보며, 식기를 신경질적으로 싱크대에 던지고는 배식대로 뚜벅뚜벅 걸어와 A에게 날카로운 말을 꽂았다. “너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 일을.”
교실이라는 온실 속에서 존중을 주고받으며 자라는 어린이들이 겪을 사회는 너무 다르다. 당장, 교실을 조금만 벗어나더라도 이렇게 겪을 수가 있는 것이다. 방금까지도 존중의 가치를 배우던 어린이는 존중이 무너진 차디찬 시간과 공간에 낯설게 서 있었다. 그것이 교실이라는 온실의 한계였다. 존중에 대해 가르친다 한들, 어린이들이 겪을, 아니 어쩌면 이미 겪고 있는 사회의 곳곳에는 존중이 무너져 있었다. A는 나와의 대화에서 눈물을 보였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 선생님을 대변하고, 변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교실이라는 온실 속에서 어린이라는 화초를 기르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한편, 교실 밖의 사람들은 교실이 정말,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그런지 세대가 만들고 있는 잘못의 원인을 교실에서 찾고 교실에서부터 뜯어 해결하고자 한다. 예컨대, 암호화폐 광풍이 불었던 시기, 묻지 마 투자가 벌어지는 때에는 경제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 교실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가짜 뉴스 문제를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벌어진 문제라고 말한다. 젊은 세대의 도박 중독, 약물 오남용 문제를 교실에서 안전하게 가르치지 않은 탓으로 돌린다. 세월호 사고가 터졌을 때도, 교실은 수많은 안전 교육과 수영 교육을 하달받았다. 2024년 하반기를 들쑤시고 있는 딥페이크 성범죄 역시, 이미 공문이 내려왔다.
그러나 교실은 이 모든 사회 문제를 적절하게 다룰 만한 적당한 공간이 아니다. 교실은 다면적 상황을 다루기엔 너무나 안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교실은 사회 문제의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정작 교실 밖의 사회에서 문제를 살피고, 반성하고, 고치는 것에는 소홀하면서, 애먼 교실을 탓한다. 하물며, 활시위는 어린이들 한 명, 한 명을 향해 있다. 누구도 어른답게 책임지려 하지 않고, 어린이들을 탓한다. 도박, 약물 문제의 원인을 어린이 개개인에게서 찾는다. 거절하지 못한 것, 호기심을 가진 것, 중독을 이겨내지 못한 것을 탓한다. 지난 세월호 사고를 통해 어린이들이 배운 것 또한, 생존수영, 비상시 안전 요령 등 안전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경고 메시지였다. 지금까지 교실에서 배웠던 ‘책임’이라는 가치와는 다르게.
교실은 2차원의 가치를 가르친다. 당연하게 말하고, 당연하게 들으며, 당연하게 생각한다. 2차원의 당연한 가치들을 모으고, 재구성하고, 해석하여 당연하지 않을,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어린이들의 경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교실 밖에서 쌓이게 될 것이다. 교실은 온실이다. 교실 안에서 모든 가치는 공동체가 함께 추구하고 지켜나갈 거라고 굳게 믿고 가르치며 배운다. 교실은 사회는 팍팍하다고 겁주지 않는다. 사회는 두려운 곳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사회에서는 누구든 의심하며 지내야 한다고 알려주지 않는다. 교실에서 배운 앎이 어린이들의 현재, 미래의 삶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교실 밖 사회라는 진짜 교실의 올바른 성장이 필요하다.
그러니 교실은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공간임과 동시에, 어쩌면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이 교실이라는 온실의 한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은 꿋꿋이 가르치며 어린이들의 바탕을 만들고자 애쓴다. 온실 밖의 날씨가 살기 좋게, 맑아지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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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예절 역할극 대본 중에서>
식당 직원: (밝은 표정으로) 어서 오세요! 여기는 친절한 식당입니다!
아빠: (손짓을 하며) 야, 메뉴판 하나 가져와.
식당 직원: (당황한 표정으로) 네?
아빠: 메뉴판!
식당 직원: (머리를 긁적이며)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이: 아빠!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요?
아빠: 왜? 나보다 어린것 같은데.
아이: (고개를 저으며) 나이에 상관없이 상대를 존중하는 표현을 쓰셔야지요.
아빠: (머리를 긁적이며) 그런가?
식당 직원: (메뉴판을 내밀며) 여기 메뉴판입니다.
아빠: (부드러운 말투로)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식당 직원: 괜찮습니다.
(식당 직원, 아빠, 아이 모두 함께 웃는다.)
고깃집에서 아빠의 무례한 모습을 보았던 경험으로 만들었다던 어린이의 역할극 대본은 앞의 절반은 진짜고, 뒤의 절반은 가짜라고 했다. 다음엔 자기가 꼭 아빠를 혼내줄 거라면서. 직원에게 꼭 사과하도록 할 거라고 하면서. 나도 꼭 그러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