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에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 (9)
교실엔 '나이만' 같은 어린이들이 모여 있다. 정말 나이를 제외하고는 캐릭터가 다 다른 어린이들이다.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싫어하는 것도 다르다. 생활환경도 다르고 성장 배경도 다르다. 대화하는 방식도 다르며, 생각을 조직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교실은 어쩔 수 없이 각기 흩어진 어린이들의 의견을 그러모아, 하나로 결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때가 많다. 예를 들어, 현장학습을 가는 버스에서는 어떻게 짝을 지어 가면 좋을지, 급식은 어떤 순서로 먹으면 좋을지, 애써 얻은 자유 시간에 무얼 할지 따위의 문제다. 어린이들은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의견들이 많지만 딱 잘라 정하기란 참 어렵다. 의견들이 모두, ‘적당히’ ‘타당한’ 이유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확 끌리는 의견도 없을뿐더러, 이건 영 아니다 싶은 의견도 없다.
그렇지만 교실 운영을 위해서라도 하나의 결정으로 매듭은 지어야 한다. 그럼 교실에서는 가장 편리하면서도 빠르게 결정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바로 ‘독재자’의 등장이다. 가타부타, 논하지 않고 한 명의 독재자가 딱 잘라 정하는 거다. 그만큼 반작용은 크다. 논할 시간도 주질 않으니 불만은 쌓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통, 교실에서 독재자라는 역할은 선생이 맡게 된다. 선생은 불만을 받더라도 큰 데미지 없이 응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이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공언하면 어린이들은 대체로 의문을 갖지 않는다(아니, 어쩌면 ‘드러내지 않는다’가 적절할 수도 있겠다.). 어린이들은 선생에게서 하달된 명령을 곧잘 받아들인다. 마치,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하향식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적응해 가는 것이다. 이 방법은 말 그대로, 선생 하나만 욕먹으면 끝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다.
하지만 ‘교실에 불어닥친 민주화의 바람*’을 고려했을 때 하향식으로 짜인 수직 구조의 교실은 다소 시의적절하지 않다. 그렇다면, 차선책을 떠올리게 된다. 편리하지도 않고 효율도 떨어지는 것이지만, 바로 민주주의 꽃이라 불리는 ‘투표’다. 투표의 방법을 택하면, 어떤 하나의 주제에 대해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의견들을 받아놓고선 다수의 선호를 확인해 결정한다. 이는 앞선 독재자의 등장보다 훨씬 어린이 친화적이기에 어린이들의 불만의 불씨를 사그라뜨릴 수 있다는 상대적 장점이 있다. 동시에, 선생의 의견도 하나의 의견으로 표결에 부칠 수 있기에 선생의 의견도 어린이들의 지지에 따라서는 채택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선생에게도 본인의 판단대로 교실을 이끌 기회가 완전히 박탈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았을 때에는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우리 반 어린이들의 표심이 그쪽으로 향하지 않은 것을. 개표 결과라는 변명의 여지없는 근거 자료가 증빙될 것이다.
그러나 교실에서 투표를 해보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첫째는, 포퓰리즘. 역시나 노는 게 제일 좋은 어린이들은,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다. 그러니 표심은 ‘즐거움’이나 ‘편함’ 따위로 향한다. 때문에, 투표를 위해 모이는 의견들은 대체로 즐거움이나 편함에 입각한 의견들이 많다. 자신의 의견이 채택되려면 어린이 대중의 관심과 요구를 읽어내 고스란히 의견에 녹여내는 것이 필요했을 테니까(선생은 고작 하나이기에 그의 마음은 읽을 필요 없다.). 따분하거나 도덕책에 나올 법한, 모범의 의견은 외면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견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예를 들어, 현장학습을 가는 버스에서는 어떻게 짝을 지어 가면 좋을지 묻는 것에 대한 대답으로 ‘그냥 친한 친구랑 짝을 지어 앉는다.’라는 의견을 내는 식이다. 어린이들은 저, ‘친한’, ‘친구랑’, ‘앉는다.’는 당장의 솔깃한 의견이 만들 이후의 눈물, 콧물 폭풍을 고려하지 않는다. 다만, 어린이들은 ‘오, 그거 좋은데?’라고 생각하거나, 이미 짝을 지어 눈을 맞추며 둘이 앉자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러면, 선생은 투표를 시켜놓고도 전전긍긍, 저 폭풍전야의 의견이 표결에서 떨어지기만을 바라며, 앓고 있다.
둘째는, 밴드왜건 효과. 어린이들은 성향이 각기 달라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어린이가 있는 반면에, 잠자코 의견을 듣기만 하는 어린이도 있다. 회색의 어린이(이른바, 회색분자.)다. 한편, 투표는 대개 회색의 어린이들을 통해 결정된다. 교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회색의 어린이들 표심이 어디를 향하는가에 따라 절대다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이 갈팡질팡한다는 것이다. 비밀 투표 대신 거수투표라도 하게 되면 회색의 어린이들은 미어캣이 된다. 본능적으로 다수에 속하기 위함이다. 자신과 친한 친구 혹은, 목소리가 큰 친구가 어디를 지지하고 있는지를 재빨리 살피는 것이다. 그럼, 회색의 어린이들은 밴드왜건이 되어 순식간에 어느 한쪽으로 쏠려버린다.
예를 들어, 급식은 어떤 순서로 먹을지 묻는 것에 어느 목소리가 큼지막한 친구가 ‘당연히 선착순 아냐?’라고 말하면, 주변의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고 미어캣이 되었던 어린이들이 휩쓸리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저 '당연히'라는 수식어가 주는 힘이 엄청난 셈이다. 그러면, 선착순이 꼭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당연히, 그 의견에 회색의 손을 든다. 선생은 이런 줄줄이 사탕 효과를 막기 위해 눈을 감은 채 거수투표를 시키거나, 번거롭더라도 비밀 투표를 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지만 이미, 주제가 만들어지자마자 한두 명 친구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결집된 무리를 깨뜨리는 건 어렵다.
셋째는, 젠더갈등. 교실의 어린이들을 절반으로 가르기 가장 쉬운 방법은 (성비가 맞지 않는 교실도 있겠으나) 남과 여로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투표의 경우에는 젠더갈등으로 변질되는 때(다만, 심각한 수준의 젠더갈등은 아니다.)가 있다. 예를 들어, 교실 자유 시간에 다 같이 무얼 할지 결정하는 때 축구와 피구로 나뉘는 경우다. 그럼, 투표가 무색하게도 남자면 축구, 여자면 피구로 나뉜다. 간혹 축구를 고르지 않는 남자 어린이, 피구 대신 축구를 고르는 여자 어린이가 있으나 눈치 챙기라는 무리의 눈초리를 받으면, 마지못해 의견을 꺾는 게 대부분이다. 그마저도 성비가 같다면 50대 50 싸움이겠으나, 한쪽이 몇 명 더 많으면 다수결 원칙의 투표에서는 필패다(우리 반이 딱 그렇다. 14대 10으로 여자 어린이가 우세다.). 선생은 이런 골치 아픈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섞지 않고 그냥 성별로 팀을 나누어 교실 반쪽짜리 활동을 시키든가, 모두가 좋아할 만한 두루뭉술한 것으로 의견을 내달라고 조건을 걸어 보지만 그것 또한,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앞서 이것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들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와 투표도 마찬가지 부침과 반작용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수가 훨씬 적은 교실이지만 그러한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독재자든 투표든, 교실의 균형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교실에서 어린이들은 배워야 한다. 무너진 균형을 바로 잡아, 정의롭게 결정하는 과정을.
스포츠데이를 앞둔 날이었다(스포츠데이라고 하니, 낯설게 느껴지는 이들이 있겠으나 운동회라 생각하면 편하다.). 스포츠데이를 앞두고 팀의 결속을 위해 반을 대표할 티셔츠를 맞춰 입기로 했다. 그러니 당연, 반 티셔츠 색상을 하나 골라야 했다. 각자 좋아하는 색이 다른 우리의 의견을 모아 하나로 정해야 하는 셈이다. 우리 교실은 나의 강권에 의한 보라색(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다.)으로 정하는 대신, 몇 친구들의 목소리 큰 의견에 휩쓸려 무채색(어린이들은 대개 검은색, 흰색을 선호한다.)으로 정하는 대신, 동그라미로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반 티셔츠의 색상을 무엇으로 하고 싶은지 말하고, 나름의 이유를 대는 것이다. 예상한 대로, 어린이들은 대부분 시답잖은 이유를 붙여가며 검은색과 흰색, 파란색, 분홍색을 추천했다. 나 또한, 시답잖은 이유로 보라색을 추천했다. 그렇게 동그란 시계의 방향으로 의견을 내던 때, 한 어린이가 불쑥 노란색을 추천했다.
“저는 노란색을 추천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반은 신호등 색깔 중에서 노란색을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늘 싸우는 빨간색도 아니고, 늘 좋기만 한 초록색도 아닙니다. 노란색을 제일 많이 닮았어요. 적당히 놀고 다투는 노란색의 우리 반이 좋아요.”
그렇게 모두가 의견을 하나씩 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뒤 친구들이 추천한 색 중에 하나를 골라 택하고 택한 이유를 말해달라는 질문으로 다시 동그라미를 돌았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색은 놀랍게도 노란색이었다. 기분 좋은 균형감을 모두가 느낀 순간이었다. 그냥 선생인 내가 독단으로 처리했다면, 다수결의 원칙으로 싱겁게 결론지었다면 나올 수 없는 결말이었다. 하물며, 반 티셔츠의 색상이 노란색으로 결정되지 않는 결말이라 할지라도, 아마 결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날, 동그라미에 앉아 어쩌면 반 티셔츠 색으로는 추호도 생각해 본 적 없었을 노란색이 선택되는 과정이 어린이들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또, 앞으로의 어린이들 삶에 어떤 의미로 남을까. 교실은 어린이들과 과정을 말하고, 과정을 배운다. 단단한 과정이 단단한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배운다. 어린이들은 결과를 세워가는 과정이 주는 기분 좋은 균형감을 느꼈을 것이다. 세상은 결과를 여전히 더 밝게 조명하겠지만, 교실은 오늘도 새롭게 말한다.
더하기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운동장에 모여 있으니 삐약삐약 병아리 같았다. 내가 추천한 색으로 모여 있는 게 신기하고 좋았다. 친구는 티셔츠가 노란색이라 자꾸 벌레가 꼬인다면서 투덜대기도 했다. 좀 미안했다. 다음엔 다른 색을 추천해야겠다.” (스포츠데이가 끝난 후, 생각노트 중에서)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 6화에 언급한 표현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