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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적인튀김요리 Sep 25. 2024

두서없음

[교실 에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 (10)

1. 서울 어느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던 한 선생이 교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교실에서. 교실에서. 그는 다른 곳이 아닌, 교실에서 짧았을, 어쩌면 너무 슬프도록 길었을 생을 마쳤다. 여름방학을 앞둔 때였다. 그러니까 어린이뿐만 아니라, 선생의 몸과 마음도 조금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그는 쉼표 대신 마침표를 택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유는 그가 세상을 떠난 장소가 말해주고 있었다. 교실이었다. 그가 어린이들과 지냈을 교실은 교실 밖 어른들의 싸움으로 뒤엉켰다. 허무했고 미안했고 또, 두려웠다.    

 

2. 선생이 학교를 멈춰 세우기로 했다. 사실, 학교를 멈춰 세우는 것이 선생들에게는 어렵고도 불편한 시도다. 해본 적도 겪어본 적도 없는 시도다. 그래서 주저하게 되고, 흔들리게 되고, 고민하게 된다. 어린이를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는 것만 같은 생각이 두렵게 끼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교육을 멈춰 세우고자 하는 것은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 희망 없는 교실 때문이었다. 무언갈 바꾸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나 싶어 벌써 허무하기도 하고 이미 죽어버린 영혼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기에 황망한 마음뿐이겠지만 멈춰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 같아, 큰 용기와 작은 기대를 그의 마지막 날에 거는 것이다.


3. 학교가 멈추기 이틀 전이었던 9월 2일 국회의사당 앞에는 30여만 명의 선생(주최 측 추산)이 모였다. 벌써 일곱 번째 집회였지만 이전의 집회와는 달리 더 많은 선생들이 전국각지에서 검은 점으로 모여들었다. 나 역시, 그곳에 있었다. 늦여름, 이글거리는 뙤약볕에 타드는 살갗보다 타드는 마음이 더 아픈 날이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나만 아픈 건 아닌 것 같아, 서로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너 가는 길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 말을 해줘. 숨기지 마.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도 언젠가 흰수염고래처럼 헤엄쳐. 두려움 없이 이 넓은 세상 살아갈 수 있길. 그런 사람이길.*” 이토록, 아프게 불렀다.

 

4. 9월 4일 2학기 개학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월요일, 나는 교실에 가지 않았다. 뜬금없이 멈추어 섰다. 교실에 선생이 없는 만우절 같은 날이었다. 어린이들은 여전히 교실을 찾았다. 어린이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선생이 하루 없는 교실은 어린이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어린이들은 때늦은 만우절 이벤트를 어떻게 기억할까. 세상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도 내내 어리둥절했다. 도저히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5. 그날의 사건을 다룬 PD수첩을 숨죽여 보는데 그의 교실 한쪽 벽면에 걸린 동요 「꿈꾸지 않으면」 가사가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마음에 밟혔다.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그는 교실에 있었던 볕이 들지 않는 작은 창고를 꾸며 어린이와 대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직접 꾸며 만들었다는, 어쩌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최후의 공간이었을 그곳이 그의 삶 최후의 공간으로 택했다. 그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했다. 부디, 좋은 꿈 꾸세요. 


6. 내가 선생이 되었을 때 기뻤던 것 중 하나는 엄마와 아빠의 기쁨이었다. 이곳저곳 선생이 된 아들 자랑을 더러 하시며 기분 좋은 부러움을 샀고, 걱정을 덜었다며 비로소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짊어지셨을 짐을 내려놓으셨다. 그렇게 아들로서 효도하는 기분이 정말 좋았더랬다. 그랬던 내가 “엄마, 누가 날 자르기 전에 내가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겠어.”라고 말할 줄이야. 오만했던 나는 예전부터 꽤 자주 들렸던 교실 붕괴, 교권 침해 사례 등을 들으면, 자세한 내막이야 잘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선생에게도 잘못이 있는 게 아니겠어, 생각했다. 요새의 나는 능력 좋은 선생이 아니라, 그저 운이 좋은 선생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7. 연말이 되었을 때, 내가 1년을 꼬박 가르친 아이들의 꿈을 재차 물으면, 선생을 꿈꾸지 않았던 어린이 몇몇이 꼭 선생을 새로이 적어 낸다. 내가 가르치는 걸 보고 감명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가르치는 걸 보니 내가 저것보단 낫겠다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매년 선생을 하겠다고 적어 내는 어린이들이 있었다. 나는 어린이들에게 내 후배가 될 수 있겠다며, 학교에서 만나자고 너스레를 떨곤 하지만 두렵다. 그 어린이들은 직장이 될 학교에서 운이 매번 좋을까. 난 어린이들의 순수한 꿈을 호탕하게 응원할 수 있을까. 


8. 요새 내선 전화를 받는 것이 다시 두렵다. 경력이 쌓이며 잊었던 오래 전의 두려움이 생생하게 끼친다.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던 좌절감이 끼친다. 다시, 전화보다는 메신저나 문자가 편하다. 전화가 울리면 두어 번 벨 소리를 삼키곤 한다. 잘못 걸려 온 전화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대부분은 싱거운 것들이겠으나, 그마저도 난 역시나 운이 좋은 편이다. 


9. 그의 49재. 49재는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승에서 붙들고 있었던 끈을 놓아주는 날이다. 어쩌면, 한시바삐 떠나고 싶은데 우리가 억지로 붙들고 있지는 않았나 미안하기도 하다. 나는 교실에 가지 않은 그날, 장염을 앓았다. 배앓이로도 이토록 힘든데, 마음 앓이 했던 그는 얼마나 아팠던 걸까.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고 헤아릴 자신도 없었다. 


10. 교실이 ‘희망을 노래하는 곳’ 임을, 그는 끝내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떠난 지금, 세상에 남아 교실을 지키고 있는 나는 그것을 믿는다. 교실을 누가 어떻게 괴롭히던 어린이가 있는 교실엔 여전히 희망이 있다. 분명히.**



* 7차 집회에서는 그 이전의 1~6차 집회 모습을 모아 영상으로 제작해 상영했다. 해당 영상에는 윤도현 밴드가 부른 「흰수염고래」(2011)가 삽입되어 있다.


** 이 글은 지난 2023년 8월 23일(https://blog.naver.com/widow123/223191768779)과 9월 1일(https://blog.naver.com/widow123/223199732776), 서이초에서 사망한 교사의 49재(2023년 9월 4일)를 앞둔 때 작성된 블로그 게시글을 다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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