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사계만을 논하지 말자
봄이 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 듣는 비발디의 사계(四季, 이탈리아어: Le quattro stagioni). 올해도 어김없이 즐겨 듣는 라디오 방송에서는 사계가 흘러나왔고 4주간에 걸쳐서 전곡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지만 음악을 중간중간 끊어가며 소넷이 포함된 해설을 곁들이니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만 같았다.
나 역시도 사계로 비발디를 입문하였다. 외삼촌께서 주신 이무지치 음반을 중학교 시절 처음 접하고 들어왔는데 어느 날 KBS 1FM에서 여태까지 들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사계를 이 시간 감상할 수 있다는 아나운서의 말에 현혹되어 그 날 라디오 실황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나는 원전연주만을 고집하며 즐겨 듣기 시작하였다.
내가 들었던 라이브는 다름 아닌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원전연주 단체 중 하나인 에우로파 갈란테의 사계 연주였다. 일단 나는 비브라토가 거의 없는 담백한 사운드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유자재로 바뀌는 템포에서 감명을 받았고, 마지막 세 번째는 디렉터인 파비오 비온디만의 독특한 해석에 매료되었다. 새로운 세계에 입문한 이런 획기적인 사건은 결국 음반 구매로까지 이어졌고 나는 날이면 낢마다 거의 이 앨범을 달고 살다시피 하였다.
나를 뒤집어 놓은 사건은 또 하나 벌어졌다. 이 사례도 역시 라디오를 통해서인데 어느 날 비발디의 한 오페라 아리아를 듣고서는 꽤 오랜 기간 동안 패닉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당시 비발디의 생애에 관한 배경지식이 조금 있었긴 했지만 사제였던 그가 오페라를 작곡한 것도 신기하였고, 무엇보다도 충격받았던 것은 이렇게 어려운 노래를 거침없이 소화해내는 가수가 너무나도 대단하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바이올린에게서 나올법한 기법을 목소리에다 적용시킨 작곡가에 놀란 건 두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이 오페라 아리아의 제목을 까맣게 잊고 지냈었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세이클럽 클래식 음악 동호회에서 드디어 이 아리아의 정체를 속시원히 알아낼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세계적인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불렀던 오페라 ≪그리셀다》 중 2막 2장 코스탄자의 아리아 "Agitata da due venti(두 줄기의 바람이 몰아치고)"였다. 조수미도 이걸 불러서 들어보신 분들도 계실 줄 아는데 멜리스마적인 기법은 물론이고 2 옥타브를 뛰어넘는 음역대와 16분음표의 빠른 연타음 등 때문에 상당히 부르기 까다로운 노래이다. http://youtu.be/H4It44mYw2I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맛보기'에 불과했다. 이후 유튜브를 비롯한 여러 인터넷 사이트들을 통하여 나는 수많은 비발디의 명곡들을 접할 수 있었고 한 때는 그에 관한 소설을 집필하고자 리서치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 그에 관한 소설이 쏟아져 나옴) 그리고는 스트라빈스키가 비발디에 대하여 얼마나 편협된 시작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물론 비발디의 음악들이 각각 비슷하게 들리는 건 어느 정도 맞는 사실이지만 그의 음악을 알면 알수록 시대를 앞서간 천재성이 돋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내가 생각하는 비발디의 매력이란 과연 무엇이고 어디에 있을까. 이걸 파해지기 전에 먼저 그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필요할 거 같다.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는 1678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 그곳에서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이발사와 산 마르코 소속 바이올리니스트를 겸하고 있던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음악의 기초와 바이올린을 배운 안토니오 비발디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시 촉망받는 직업인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1703년부터는 베네치아의 고아원 및 음악학교인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의 바이올린 교사로 취임하여 이후 합주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협주곡이고 본업이 사제였던 만큼 오라토리오, 모테트 등의 교회음악도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비발디가 평생을 몸담았던 피에타 양육원에는 여성들로만 구성된 당시 유럽에서 가장 실력 있고 인기 있는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본으로 한 개 이상의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양육원을 나온 뒤 전문 연주자의 길을 걸은 이들도 있었다. 비발디는 이들을 위하여 많은 협주곡들을 작곡하였는데 그가 평생 함께했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이외에도 플룻, 오보에, 바순, 트럼펫, 호른 등 매우 다양한 솔로 악기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이건 당시 비발디가 이 특별한 오케스트라를 위하여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도전정신을 펼쳤는지 느낄 수 있다.
그럼 성악곡은 어떨까. 나는 개인적으로 느린 음악에서 전율이 느껴진다. 단순히 템포가 느려서 좋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 영혼과 영혼이 대화한다는 느낌, 혹은 그걸 들음으로 말미암아 천국문이 활짝 열리는 환상을 보아 황홀감에 빠지는 기분이다. 사실 전해 내려오는 에피소드만으로 한 사람의 됨됨이, 그리고 신앙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할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의 종교음악을 들을 때마다 비발디가 정말 간절히 구하는 심정으로 작곡을 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이런 평가들이 나오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렇듯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니 결국에는 초보자 시절에 즐겨 들었던 사계를 비롯한 협주곡들은 멀리하게 된다. 하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음악가들이 존재하기에 익히 잘 알고 있는 곡이라 할지라도 다양한 버전을 접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리고 유튜브를 적극 활용하여 숨어있는 명곡들도 찾아서 듣곤 한다. 바라건대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이 계시다면 비발디에 대한 지경을 좀 더 넓혀주셨음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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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society6.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