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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코 Barroco
Dec 27. 2019
J. S. Bach의 간략한 생애와 <프랑스 모음곡>
대학 시절 독일문화의 이해 발표자료로 제출하던 걸 이곳에 공개하다
1. Johann Sebastian Bach(1685~1750)의 생애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흔히들 세바스찬이라 부르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독일 사람 다운 이름을 부르기를 더 좋아하는지라 제바스티안이라 칭한다. - 의 타고난 음악성에 대해서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는 문제에 있어서 대체로 전자에 비중을 더 크게 두는데 그 이유는 바로 바흐 집안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전문 음악가 집안으로 이미 전 유럽에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한때 ‘바흐’라는 용어가 ‘전문 음악인’을 뜻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니 어렴풋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다. ‘대바흐’ 요한 제바스티안은 이러한 집안의 전통의 종합적인 계승자로 4명의 아들들에게도 훌륭한 유산을 물려주는데 이들은 아버지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고전주의 음악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바흐는 다른 작곡가들과는 달리 모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를 여행하거나 연주회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서 거쳐 간 독일의 도시는 출생지인 아이제나흐(Eisenach, 1685~1695)→부모를 여의고 학생 신분으로 거리의 가수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곳 올드르프(Ohrdruf, 1695~1700)→형의 보살핌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아간 뤼네부르크(Lüneburg, 1700~1702)→최초로 직장을 구한 바이마르(Weimar, 1703, 1708~1717)→그리고 아른슈타트(Arnstadt, 1703~1707)→사촌이자 첫 번째 부인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식을 올렸던 뮐하우젠(Mühlhausen, 1707~1708)→궁정악장으로 지내면서 첫 번째 부인을 병으로 잃고 두 번째 부인인 안나 막달레나를 맞이하는 괴텐(Köthen, 1717~1723)→마지막으로 성 토마스 교회(St. Thomas Kirche)의 칸토르(Kantor, 교회음악감독)로 제직 하면서 더 유명해진 라이프치히(Leipzig, 1723~1750)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음악학자들이 정의하는 네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① 아른슈타트 시대(1703~1707)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하였다. 당대 오르간의 거장인 북스테후데의 음악을 듣기 위해 370km를 걸어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육촌남매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식을 올린 시기로 행복해 보이는 생활이지만 루터교 안에서 경건파와 정통파 간의 대립으로 인해 바이마르로 이주하게 된다.
② 바이마르 시대(1707~1717)
교회 음악을 중시하는 루터교의 열렬한 신봉자인 바이마르 성주 에른스트의 악장으로 지내게 된 시기이다. 바흐의 오르간 작품의 절반 이상이 만들어진 때이기도 하다.
③ 괴텐 시대(1717~1723)
교회 음악을 중요시하지 않는 칼뱅교였던 괴텐 궁정의 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귀족들을 위한 실내악이 많이 만들어졌다. 첫 번째 부인을 잃는 슬픔에 잠겼지만 곧 12살 연하의 안나 막달레나를 아내로 맞이한다. 괴텐 공의 부인이 음악에 점점 흥미를 잃게 되고 이로 인해 바흐는 자신의 안정된 직장과 자녀의 교육 문제 등을 고려하여(그때나 지금이나 자식에 대한 부모님들의 교육열은 변함이 없는 거 같다.) 라이프치히로 이주를 결심한다.
④ 라이프치히 시대(1723~1750)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서 성악, 기악, 합창, 심지어 라틴어 수업까지도 담당하였다. (바흐 시대만 해도 성 토마스 교회 옆에는 부속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 하지만 학생들과 교회 당국, 그리고 시참사회와의 끝없는 갈등으로 인해 그의 직무에 대한 열정은 점차 식어만 갔다. 교회력과 행사(주로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의한 교회음악 작품들이 남겨지고 있으며 아마추어 대학생 연주단체인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kum)를 위하여 세속 칸타타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물론 바흐의 생애를 이 네 가지로 요약한다는 거 자체가 쉽지 않다. 그만큼 그의 생애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느껴지는 바흐의 음악은 종교성이 확고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독실한 루터교 신자인 그는 제5의 복음서 저자, 신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사람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그만큼 그의 삶과 음악에 있어서 보통 사람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그만의 영적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기본적인 서적들은 학교 도서관에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으며, 필자는 개인적으로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안나 막달레나 바흐의 일대기>(Die Chronik der Anna Magdalena Bach)라는 흑백 독일 영화를 통해서 바흐 음악을 좀 더 친숙하게 접근시켜나갈 수 있었다.
2. 프랑스 모음곡은 프랑스와 관련이 있다?
아무리 종교성이 짙은 바흐라도 모든 음악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커피 칸타타, 농민 칸타타는 너무나도 유치한(?) 텍스트를 기초로 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회 음악을 금기시했던 괴텐 시대의 바흐는 귀족 전속 작곡가였기 때문에 그 시대에 작곡된 음악들은 대체적으로 가볍고 클래식 초보자들에게도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
이번 수업 시간에 발표하게 되는 프랑스 모음곡 5번은 괴텐 시대가 아닌 라이프치히 시대인 1724년 혹은 1725년에 작곡되었다.(곡이 발랄하다고 무조건 괴텐 시대라고 하는 오류가 없기를!!) 바흐는 총 6곡의 프랑스 모음곡을 남기고 있는데 각각 알라망드, 사라방드, 꾸랑뜨, 가보트, 미뉴엣, 지그 등의 춤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랑스 모음곡이라는 명칭은 바흐 자신이 아닌 어느 누군가에 의해 18세기부터 통상적으로 칭해지게 되었다. 프랑스 모음곡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영국 모음곡보다는 보다 가벼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모음곡들은 바흐의 둘째 부인인 안나 막달레나를 위해 만든 작품집 속에도 포함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여인은 남편과 20여 명가량 되는 자식들을 위해 궂은 집안일을 다하였으며 때로는 악보 사보 하는 일에도 열심히여서 바흐의 필체와 거의 흡사할 정도로 남편에게 헌신하였다.
시간 관계상 5번 전곡을 연주할 수는 없고 제일 마지막 악장인 지그를 연주하게 된다. 지그란 영국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농민의 춤곡으로 보통 모음곡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아주 경쾌하고 빠른 곡이다. 형식은 푸가인데 푸가란 주제가 한 성부에서만 나오다가 다른 성부에서 모방하면서 나오고 이것이 어우러져 화음을 이루며 진행시켜 나가는 수평적인 바로크 시대 최고봉의 음악 양식이다. 감상 포인트는 주제가 어느 성부에서 시작되며 그 주제가 끝난 뒤 또 어느 성부에서 어떻게 변형되어 나오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