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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Oct 02. 2023

미하일 플레트뇨프의 영웅폴로네즈

F. Chopin | Nocturne No.20 in C# Minor


해가 뜨면 지는 것이 당연하고, 해가 쨍쨍하여 맑다가 어느 날은 어둑어둑 먹구름이 끼기도 하며, 때론 비 또는 천둥번개를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맑은 날은 찾아온다. 우리의 인생도 날씨와 같아서 항상 밝게 빛나지만도, 항상 어둡고 흐리지만도 않다. 물론 행복과 슬픔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이어서 상황에 대해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절대적으로 ‘누가 봐도’ 명암을 구분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있지 않나. 그 명암이란 것이 수없이 번갈아가며 드리워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그 사실을 늘 인지하여 내가 어둠의 상태에 놓여있을 때 최대한 평정심을 찾아보고자 노력은 하지만 생각처럼 마냥 쉽지만은 않다. 그럴 때 어둠 속에서 나에게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주변이 어두울 때 비로소 드러나는 작고 희미한 불빛이다. 주변이 밝을 때는 눈에 잘 보이지 않다가 주변이 어두워지면 그제야 “나 여기 있어. 난 언제나 여기 있었어.”라고 말하는 무언가가 눈에 띈다. 평소에는 크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나를 구성하고 나를 지탱하는, 마치 물이나 공기와 같은 존재들 말이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꽃들, 하늘, 또는 가족이나 친구들 등 다양한 모습으로 때마다 내 곁에서 나의 기운을 북돋워준다. 어두워졌을 때 내게 빛을 보여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얼마 전 미하일 플레트네프의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바로 이와 같은 인생의 진리를 연주로써 느낄 수 있었다.

명피아니스트이지만 지휘자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미하일 플레트네프. 이번에는 그가 전곡 쇼팽 피아노곡으로만 구성한 프로그램을 들고 리사이틀로 한국을 찾아왔다. 물론 그가 좋아하는 시게루 가와이 피아노도 함께.


미하일 플레트네프의 쇼팽 연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전반적으로 음에 먹구름이 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점이었다. 폴로네이즈, 판타지, 바르카롤, 녹턴 등 다양하게 구성된 이 모든 곡에 먹구름이 한껏 드리워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습하고 어둑어둑한 느낌이었지만 그의 연주는 결코 음울하거나 처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게 어둠 속에서도 진리는 결코 그 빛을 잃지 않고 아름다움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음악이 네 귀를 타고 흘러 들어가 네 영혼을 한껏 적시고 있는데 당장의 어둠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 게 뭐 있니?”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의 쇼팽은 호수 위에 찬란히 빛나는 윤슬처럼 아름답지도, 빗속의 길 잃은 고양이처럼 처연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흔히 쇼팽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으레 떠올려보는 흔한 특징들은 그의 쇼팽에 적용할 수 없었다. 그의 쇼팽은 감히 내 마음대로 생각해 보건대, 쇼팽의 이름을 빌려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같은 쇼팽이었다. 가끔은 이런 쇼팽도 색다르고 좋구나.


그의 먹구름 드리워진 쇼팽 연주의 마지막 곡은 영웅 폴로네즈.

사실 나는 그의 이번 리사이틀에서 이 곡의 연주에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내가 생각해 오던 영웅폴로네즈(이하:영폴)에 대한 이미지와는 아주 다른 영폴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것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폴 연주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연주로, 내 마음속의 영폴이란 이처럼 밝고 씩씩하며 위풍당당한 이미지의 곡이었다. 그런데 플레트네프의 영폴은 ‘영웅’이 아니라 “졌잘싸*”폴로네즈 같다고 할까나. (*졌지만 잘 싸웠다는 뜻의 줄임말. 밈.)

“우린 지고 돌아오는 길이야. 근데 우린 정말 최선을 다 했고, 난 만족해. 난 우리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말해줄래.”

라고 그의 영폴은 빗속에서 웃으며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영폴에서 인생의 진리를 마주했다. 먹구름 가득 드리워진 듯했던 그의 연주회는 마지막 영폴을 통해서 어둠 속에서도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일깨워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네가 무엇을 배우고 느끼고 얻었는가야.



커튼콜 때 찍은 Pletnev와 시게루 가와이 피아노. (IG:@myhugday)







Mikhail Pletnev의 영폴 연주 영상은 등록된 것이 없어 그의 Chopin Nocturn No.20 연주 영상을 첨부해 본다.♪




이리저리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삶은 균형을 통해 결합을 유지하고 있다. 마치 칼더의 우주처럼 말이다. <A Universe> by Alexander Calder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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