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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Oct 09. 2023

슈만과 시인의 사랑, 그리고 심준호 첼로 리사이틀

R. Schumann | Dichterliebe, Op.48


올해 초봄, 아직은 코트를 벗어던지기 힘든, 봄이라고 자신 있게 부르기엔 쌀쌀하던 그 봄에 나는 갑작스레 운명처럼 슈만의 음악과 사랑에 빠졌더랬다.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치의 폭이 넓어지고 그 유형이 다양해질수록, ‘나’라는 틀 안에서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은 크고 작은 변화를 맞이하기 마련인데, 내가 갑자기 슈만의 음악과 사랑에 빠진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20대 초반의 나는 지금의 나와 살짝 다른, 밝고 기쁨이 넘치는, 푸른 봄 들판에 가득 핀 노란 유채꽃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랬던 내가 이런저런 삶의 시간을 지나 스물아홉이 된 지금, 이제는 슈만의 음악 안에 담겨있는 고뇌를 진정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나 보다.


슈만 음악과의 사랑의 시발점은 아마도 작년 혹은 재작년쯤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슈만의 첼로 협주곡이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내 마음에 와닿았고 그 곡을 듣던 나는 별안간 눈물을 또르르 흘리고 만 것이다. 세 악장에 걸쳐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을 타고 슈만의 고뇌가 내게 전해졌던 것일까. 짧은 시간일지라도 같은 감정을 함께 나눈 사람에게 괜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듯, 그때부터 슈만의 곡을 전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지 않나 싶다.

그 후 올해 초, 슈만의 <시인의 사랑> 연가곡집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은 나는 본격적으로 슈만의 음악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하여 나는 슈만과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고, 슈만의 음악에 푸욱 빠져 지내며 슈만 음악 애호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슈만 <시인의 사랑>은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의 <노래의 책> 중 ‘서정적 간주곡’에 음악을 붙여 만들어낸 가곡집으로, 슈만의 음악성과 더불어, 그의 타고난 남다른 시적 감수성과 문학성이 돋보이는 곡이다. 가사에 이보다 걸맞은 음악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가곡집에서 그의 시적 감수성은 한껏 빛을 발하며, 음악을 통해 가사를 이렇게도 살릴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그의 문학성 역시 빛이 난다. 그의 시적 감수성은 특히 몇몇 곡들의 후주에서 빛을 발하곤 하는데, 이를테면 12번째 곡 'Am leuchtenden Sommermorgen (햇빛 반짝이는 여름 아침에)' 그리고 16번째 곡 'Die alten bösen Lieder (낡아빠진 못된 노래들)'에서 피아노 독주가 길게 이어지도록 한 점이다.

<시인의 사랑>의 마지막 곡 Die alten bösen Lieder의 경우, 노래의 마지막 구절이 끝나고 약 2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피아노 독주가 이어진 후에야 비로소 이 곡도, 이 연가곡집도 끝난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때론 언어만으로 모두 설명하기에 애매한 때가 있다. 특히나 ‘사랑’과 같이 다소 추상적이고 복잡한 영역의 것들은 더욱 그럴진대 슈만은 그 복잡한 상실의 애수를 피아노 독주로써, 말없이 나직하게 이어지는 음악으로써 매우 효과적으로 풀어냈다. 적막 속에서 그 담담한 피아노 솔로를 다 듣고 나면 나도 모르게 “아…”라는 공허하고도 희미한 탄식을 내뱉게 된다. 사랑은 저들이 했는데 마치 내가 0고백 1차임 당한 기분이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서도 성장하지만 상실을 통해서도 성장한다. 그의 <시인의 사랑>을 듣는 동안 나도 함께 격정적인 사랑과 상실의 과정을 경험하게 되니, 전곡을 다 듣고 난 후엔 나 역시 한 단계 성숙한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0고백 1차임. 그렇다면 나는 이 곡을 수차례 들으면서 도대체 몇 번의 실연을 겪은 것인가. 이렇게 보니 꽤 재미있는 곡이다. 하하






슈만 애호가가 또 한 분 계시는데, 바로 첼리스트 심준호이다. 우리나라의 첼리스트로 매우 활발한 연주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멋진 연주자인데, 얼마 전 예술의 전당 IBK챔버홀에서 전곡 슈만으로 리사이틀을 진행하였다. 슈만의 <3 Romances, Op.94>와 <Dichterliebe, Op.48> 그리고 <Cello Concerto, Op.129>로 프로그램이 구성되어 이 가을, 슈만의 감성을 짙게 느낄 수 있는 연주회였다. 오랜 시간 동안 슈만의 음악을 사랑해 왔고, 슈만의 음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시던데 과연 슈만의 곡들에 대한 그의 해석이 참 좋았다. 박종해 피아니스트와 함께 1부의 로망스와 시인의 사랑을 연주하였는데, 두 연주자 간의 호흡이 어찌나 좋던지 그들이 함께 빚어내는 슈만의 사랑의 이야기가 애상적인 선율을 타고 왜곡 없이 고스란히 객석에 전해졌다. 첼로 연주만으로 과연 언어의 무게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심준호 첼리스트의 첼로 소리는 어쩌면 언어보다도 더욱 효과적으로 시인의 마음을 전해주었다. 콘서트홀에 비하여 작은 규모의 공간인 IBK 챔버홀 안에, 작은 방 안에 뭉게뭉게 피어나 어느새 빽빽하게 들어찬 담배 연기처럼, 애상의 여운이 먹먹하도록 꽉 찼다. (오해할까 봐 일러두는데 나는 비흡연자이며 담배 냄새를 매우 싫어하고, 한 번도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시인의 사랑 마지막 곡의 피아노 독주가 끝난 후 그 순간 어떻게 박수를 칠 수 있단 말인가. 박수에 앞서 나는 눈물이 나는 것을 참으려고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안면 근육에 가득 힘을 주고 있었다. 박수 소리 따위를 울려 이 공기를 꺼뜨리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이내 객석에서 우레와 같이 터져 나오는 손뼉의 파열음에 나도 박수를 쳤다.


2부에 이어진 첼로 협주곡은 오케스트라 대신 네 대의 첼로를 위한 협주곡으로 Richard Klemm이 편곡한 버전이 연주되었다. 심준호 첼리스트와 함께 Dmitry Lee, 채훈선, 박상혁 첼리스트들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는 원곡 버전에 비하여 첼로 독주 파트가 훨씬 잘 들린다는 점이 좋았지만, 곡의 전체를 놓고 생각했을 때 아쉽게도 나는 원곡 버전이 더 좋았다. 그래도 네 연주자가 주고받는 호흡이 좋았고, 좋아하는 곡의 색다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이 기회가 소중하게 여겨졌다.


이 연주를 모두 들으며 앙코르곡으로 'Widmung'을 연주해 주시면 참 좋겠다고 소망했는데 정말로 Widmung이 연주되었다. 슈만 하면 Myrthen 가곡집을 떼어 놓을 수 없고, Myrthen 하면 Widmung 아닌가! (Widmung을 좋아하는 내 사심이 반영된 말이다.^^;;)

최근에 아름다운 신부와 백년가약을 맺은 첼리스트가 연주하는 Widmung이었기에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들렸다.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Widmung을 듣는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이 연주를 객석에서 듣고 계실 그의 아내 분이 참으로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시인의 사랑> 중에서도 내가 특히 더 좋아하는 곡들 중 하나인 VIII. Und wüßten's die Blumen, die kleinen(작은 꽃들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 Fritz Wunderlich가 노래하고 Hubert Giesen이 피아노를 연주한 버전이다.♪


XII. Am leuchtenden Sommermorgen(햇빛 반짝이는 여름 아침에)♪


XVI. Die alten, bösen Lieder(낡아빠진 못된 노래들)♪






슬픈 사랑이야기 하면 우리나라의 화가, 이중섭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아내에게 보낸 엽서에 그린 그림들 중 하나인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by 이중섭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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