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의 첫날 아침이다. 미처 동도 트기 전의 짙은 쪽빛 풍경이 창문 너머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커피 한 잔을 내려 들고 식탁에 앉아 멍하니 창문 밖 어스름과 마주 보고 있는 이 순간, 공기처럼 익숙하고 당연했던 환경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놓인 첫날로부터 기인된 기분 탓인지 몰라도 이 무상한 행위를 하고 있는 정적인 순간마저 괜히 설레고 뱃속이 간질간질하다. 뭐랄까… ‘설렘’이라는 양분을 먹고 자라는 꽃이 뱃속에서 꿈틀꿈틀 피어나려는 것 같달까.
이번 런던 라이프의 첫 아침이라고 할 수 있는, 다시 오지 않을 뜻깊은 순간. 고요한 침묵과 차분한 공기만이 감도는 가운데, 창 밖의 하늘은 짙은 쪽빛에서 맑은 하늘빛으로, 물감통 안의 수채화 물감이 퍼져 나가듯 조금씩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다. 아, 정말이지 뱃속이 간지러워 죽겠다. 물론 기분 좋은 간지러움이다.
아침 식사로 햄이 아낌없이 들어간 얼큰한 부대찌개를 먹었다. 평소엔 여간해선 먹을 일 없는 부대찌개인데 이곳 런던에서 먹는 부대찌개는 어쩜 이리 맛있는지 모르겠다. 비행기에서 기내식으로 내내 사육당하다 온 뒤 지상에서의 첫 식사여서 그런지 더욱 감격스럽기만 한 맛이다.
영국의 우유는 한국의 우유보다 더 부드럽고 포근한 맛이다. 구름 같은 카페라테를 한 잔 마시고 집을 나섰다.
나의 첫 번째 발걸음이 향한 곳은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미술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집에서 불과 5분 거리의 가까운 곳이어서 가는 것뿐이다. 지난 런던 여행 때 테이트브리튼을 못 갔던지라 안 그래도 이번엔 꼭 가야겠다 마음먹었었는데 집에서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있다니, 아무래도 이곳에 자주 갈 것 같다. 내가 이전의 런던여행기에서 예찬했던 최애 미술관 '내셔널갤러리'도 집에서 비교적 아주 가까운 편이다. 걸어서 약 30분 정도 거리이니 말이다. 이곳저곳 좋은 장소들이 모두 거주지에서 가까워 몹시 행복하다.
테이트브리튼의 건물 외관은 매우 깔끔하여서 언뜻 보기엔 현대미술 갤러리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실제로 갤러리로 들어가는 내부의 원형 계단도 어딘가 현대미술관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의 말 그림들과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종교적 그림들이 나를 반긴다. 조지 스텁스도 그렇지만 특히나 윌리엄블레이크 작품은 한국에서 만나보기 어려운지라 매우 반가웠다.
이 반가운 그림들을 만끽하고 싶은데 아직 시차에 적응되지 못한 육체가 나를 방해한다. 도저히 눈을 뜨고 있기 힘들 정도여서 하는 수 없이 일단 커피를 마시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나는 구글맵을 켜 가까운 곳의 괜찮은 커피숍을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리뷰가 압도적으로 좋은 호평 일색의 한 카페를 발견하여 기쁜 마음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뻘쭘하리만큼 고요한 분위기가 나를 매우 당황스럽게 했지만 ‘런던라이프의 첫 카페’ 버프를 받아 그 어색함 마저도 개성으로 포장되는 마법이 일순간 일었다.
쇼케이스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빵과 케이크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화려하게 생긴 케이크에 눈길이 갔다. 이름도 Luxury Fruit Cake다. 나는 그 럭셔리 과일 케이크 한 조각과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해 받아 들고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오, 케이크는 정말이지… 예상을 깨고 매우 당혹스러운 맛을 자랑했다. 케이크 안에 건포도가 한가득이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케이크를 구성하는 재료의 비율이 밀가루가 9%, 건포도가 91%쯤 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건포도를 쌓기 위해서 밀가루를 바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케이크였다. 건포도가 그렇게나 많으니 케이크는 당연히 지독하리만큼 달았다. 아까워서 꾸역꾸역 거의 다 먹었지만 정말이지 이런 케이크를 먹게 될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에스프레소를 들이켜도 전혀 개선되지 않는 기면(嗜眠)에 이대로 바깥에 돌아다니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결제하려고 보니 신용카드가 다른 외투 주머니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나온 것이 아닌가. 나는 매우 당황하여 허둥대다가 대역죄인과도 같은 심정으로 직원에게 말을 꺼냈다.
“I’m so sorry, but I just realized I left my credit card at home. I actually live nearby, about 10 minutes walk from here. Would it be okay if I went home to grab my card? I’ll left my ID with you.”
그러자 직원은 매우 흔쾌히 오늘은 그냥 가고 내일 다시 와서 결제하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이 편치 않으니 지금 후딱 가서 카드를 가져오겠다고 했으나 직원은 한사코 괜찮다며 내일 다시 오란다. 그래서 나는 결국 런던라이프 중 첫 방문 카페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어처구니없게도 외상을 하게 됐다. 단골손님도 아니고 웬 처음 보는 외국인 여자에게 망설임 없이 외상을 제안하는 그들의 관용이 퍽 고마운 것은 물론이고 역시 런던 사람들은 참 한결같이 친절하구나 싶어 새삼스레 또 감동이 일었다.
거주지에서 빅벤 및 런던아이가 매우 가까운데 그 말인즉슨 템즈강 또한 매우 가깝기도 하다. 골목만 나가면 바로 템즈강이라 로망이었던 템즈강 러닝을 실현하기에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겠다. 어제는 종일 비행기 안에 갇혀 사육만 당했으니 오늘은 몸 좀 푸는 것이 좋겠다 싶어 내친김에 당장 옷을 갈아입고 러닝을 나섰다. 그다지 춥지 않은 런던의 겨울 날씨 속,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빅벤과 국회의사당 건물을 바라보며 템즈강을 따라 달리는 기분이란 매우 낭만적이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달리고 돌아와 어이없게도 라면을 끓여 먹으며, 좋은 사람들과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속에 우당탕탕 요란했던 런던라이프 첫 하루를 마무리했다. 앞으로 이어질 날들이 아마 눈 깜빡할 새에 쏜살같이 흘러가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알찬 런던라이프가 될 수 있도록 정신 차려야지!
Sweet Drea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