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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Oct 03. 2023

가을꽃의 인사와 호박꽃 타임머신, 그리고 즐거운 농부

R. Schumann | Frohlicher Landmann



올해는 개천절과 겹쳐 제법 넉넉하게 추석 연휴를 즐기게 되었다.

여느 주말 때처럼 집 근처 커피숍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드문드문 길마다 전에 못 보던 꽃들이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누가 포스터물감으로 정성스레 덧칠하고 또 덧칠한 듯 꽃잎 한 점 한 점마다 빈틈없이 섬세하게 채색된 선명한 진홍색이며, 주황색이며, 보라색이며 하는 온갖 가을의 색깔들이 내게 한껏 존재감을 뽐내며 유혹의 광채를 내뿜었다. 세이렌과 같은 그 매혹적인 빛깔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나는 홀린 듯 꽃 앞에 멈춰 서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꽃을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었다. 가을의 도착을 알리는 것은 비단 높고 맑은 하늘, 콧구멍에 스며드는 서늘한 기온, 전보다 이르게 안녕을 고하는 해뿐만 아니라 이토록 비단처럼 선명하고 영롱한 빛깔의 꽃들도 있었음을 잠시 깜빡했다. 뒤늦은 가을꽃의 인사에 가슴이 또 한 번 설렌다.


길에서 마주한 가을꽃들. 색깔이 어쩜 이렇게 그림처럼 선명하고 예쁠까!



가을꽃과의 만남에 마음이 들떠서였을까, 평소 다니지 않던 다른 길로 들어섰다. 그 길에서는 반갑게도 노란 호박꽃이 덩굴을 이루어 가옥들의 지붕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그 호박꽃은 보자마자 순식간에 나의 어릴 적 기억 속 큰어머니네 집 마당으로 나를 데려갔다.

추석 때마다 방문했던 큰어머니네 집 마당에는 언제나 노란 호박꽃이 길게 자라 있었다. 그 꽃의 모양은 내가 좋아하는 백합을 닮은 것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꽃잎이 마치 배춧잎 같기도 하다. 한편으론 노란색이 마치 해바라기를 연상시키기도 하니 호박꽃은 참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개성 있는, 독특한 매력의 꽃이다. 게다가 (내가 살던 동네에는 호박꽃을 잘 볼 수 없었으므로 큰어머니네 집에 방문할 때에나 볼 수 있었다.) 추석 때만 볼 수 있는 꽃이어서인지, 호박꽃은 내게 북적북적 정겹고 즐거운 가을날의 한 때를 연상케 하는 상징물처럼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한 상징물인 호박꽃을 아주 오랜만에, 아주 뜻밖에 마주하였으니 반가울 수밖에 없으리라. 그 호박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디선가 솔잎 깐 찜솥에 송편 찌는 냄새, 소쿠리에 가득 놓인 전의 기름진 냄새, 오래된 주택에 밴 푸근한 살림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시끌벅적한 친척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과거의 평화롭고 포근했던 한 때의 기억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가, 시야에서 호박꽃이 사라지면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어린 시절 추석의 기억이다. 어린 내게 추석이 이토록 따뜻하고 정겨운 느낌으로 기억될 수 있게 해 준 어른들께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다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난 직후라 힘들었을 텐데 또 아이들을 데리고 장시간 운전을 하여 그곳에 모이고, 모여서도 집안일을 하느라 또 힘들었을 것이 분명한데, 나를 비롯한 아이들을 데려다 재미있게 놀아주고 세뱃돈도 쥐여주고 한 어른들께 감사하다.

명절 연휴도 이제 거의 끝나가는 지금, 곧 출근할 생각에 침울하기도 하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운 내서 우리 학생들에게 즐거운 에너지만 전해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든다. 어린 시절 내게 어른들이 그렇게 해주었듯, 나도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그런 어른, 그런 선생이 되어줘야지.




가을의 햇곡식과 햇과일로 풍성한 추석(秋夕) 연휴이다. 농부들이 그간 정성 들여 키운 농작물들이 드디어 결실을 맺고 농부들에게 성취감과 즐거움을 안겨주는 계절이다. 이런 때에 슈만의 <즐거운 농부>가 생각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즐거운 농부(Fröhlicher Landmann)'는 슈만의 <어린이를 위한 앨범, Op.68> 중 열 번째 곡으로, F장조 및 4/4박자로 구성되어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선율이 즐거운 농부의 경쾌한 발걸음을 연상시킨다. <어린이를 위한 앨범>은 슈만이 본디 딸의 생일 선물로써 작곡했던 소품집 <크리스마스 앨범>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수록곡과 곡집명을 변경하여 최종적으로 탄생한 곡집이다. 이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들이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기에 좋은데 오늘은 날이 날인만큼 '즐거운 농부' 곡을 콕 집어 소개해 본다.






Robert Schumann의 Fröhlicher Landmann(즐거운 농부) 유튜브 영상을 첨부해 본다.♪




우리나라의 민화 <책가도>. 큰어머니네 집 다락문을 열면 책과 잡동사니들이 이 그림처럼 쌓여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난 책가도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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