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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Sep 17. 2023

일요일 오전의 투명인간

혁오 | TOMBOY





잘 자고 있던 나의 머리를 누가 갑자기 세차게 때리기라도 한 듯, 번쩍 눈을 떴다. 먹구름이 껴 있어 어둑어둑하긴 했지만 어쨌든 해가 중천에 떠 있다는 사실 쯤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곧이어 “맙소사! 난 도대체 왜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잔 거지?”라는 독백과 함께 아연실색을 하며 허둥지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얼마 안 되는 길이의 계단을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출근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그 시간 동안 어떻게 시간 분배를 하여 출근을 위한 준비를 마칠 것인지 재빠르게 계획하였다. 내려가자마자 내가 정말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자는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 눈에 선명히 들어온

9월 17일(일)
10:34


“아… 오늘 일요일이구나….”

그렇다. 우습게도 나는 오늘이 월요일인 줄 알았던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잠시 바닥에 드러누웠다. 창밖을 보니 간밤에 내리던 비는 그쳐 있었고, 바닥은 차가웠다. 내가 이렇게 고요하고 차가운 상태에 계속 머무르고 있어도 된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얼떨떨하다. 잠이 덜 깼기 때문인 걸까.

드러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에 왠지 좀 귀찮다. 주섬주섬 천가방 안에 책과 노트북, 에어팟 그리고 텀블러를 쑤셔 넣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집 앞 스타벅스로 향했다. 비가 그쳐 있었지만 혹시 또 비가 올지 모르니 가벼운 우산도 하나 챙겼다.


커피숍 안에 들어서니 주말 오전답게 아주 북적북적하지는 않지만 적당히 사람들로 가득 찬, 활기가 느껴지는 풍경이 나를 맞이했다. 커피콩 탄 내와 목재 가구들에서 나는 나무 냄새가 습기를 만나 더욱 강렬하고 깊은 향을 내뿜었다. 물론 나는 이 냄새를 좋아한다. 나는 창문 밖이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디즈니플러스와 스타벅스가 함께 손을 잡고 이벤트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특정 제품을 사이렌오더로 주문하면 디즈니플러스 일주일 이용권을 증정하는 이벤트다.(이것은 절대 광고가 아님을 밝힌다. 그런 데서 나에게 광고를 요청할 리도 없다.) 나도 이벤트에 참여하고자 몽블랑 보늬밤 케이크 그리고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막상 집에서 디즈니플러스를 즐길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케이크 하나를 다 먹어갈 때쯤 되니 내가 읽고 있던 책도 어느덧 마지막 장을 남겨두고 있었다. 밖에는 다시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넋 놓고 바라보았다.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난 책을 덮고는 에어팟을 끼고 음악을 틀었다. 나는 '잔나비'와 '혁오'를 좋아한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젊은 두 밴드로, 직접 작곡 및 작사를 하는 만큼 각자의 음악적 개성이 뚜렷하며, 특히 의미심장하면서도 젊은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사를 써내곤 한다. 혁오의 Tomboy를 필두로 하여 당장 생각나는 그들의 노래 몇 곡을 재생목록에 추가했다. 귓속에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 찬란한 빛에 눈이 멀어 꺼져 가는데. 아아아아”라는 노랫말이 흘렀다. 커피숍 안의 사람들이 나누는 말소리가 언어의 형체를 제대로 식별하기 어려운 웅웅거림으로 변하여 노래의 반주음악처럼 계속해서 맴돌았다. 빗방울이 마치 엎어진 비즈통에서 쏟아져 나온 비즈들처럼 유리 창문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밀려드는 주문에 커피콩을 갈고 갈고 또 갈다 보니 콩의 탄 내도 한층 짙어진 채로 내 코에 훅 들어왔다.


그저 에어팟 한 쌍을 양쪽 귀에 꽂았을 뿐인데 이 자그마한 흰색 물체가 외부와 나 사이에 어떠한 막을 씌워놓은 것만 같다. 나는 명백하게 현실의 공간 안에 놓여 있는데 마치 이 공간과 분리가 되어 있는 것 같은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기이하기는 하지만 나는 그 기분이 참 좋았다. 당연히 사람들에겐 내가 보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내가 투명인간이 되어 사람들 틈을 자유롭게 헤집고 다니는 것 같았다. 어릴 때 누구나 “내가 투명인간이 된다면?”이라는 흥미로운 상상을 해 봤을 것이다. 나는 그 상상에 대한 대답을 어렴풋이나마 지금 듣고 있는 것 같다. 상상한 대로, 투명인간이 되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어느새 비가 또 그치고 햇살의 강렬한 시선이 창을 뚫고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자리의 블라인드를 치기 위해 귀에서 에어팟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큰 키를 가진 내가 커피숍 한복판에 일어서 있으니 그 존재감이 제법이다. 방금 전까지 투명인간이었던 내가 이제는 불투명한, 그야말로 현실의, 지극히 보통의, 정상적인 인간이 되었다. 그저 귀에 꽂고 있던 작은 덩어리를 뺐을 뿐인데 투명에서 불투명으로 성질이 변했다. 다시 저 덩어리를 귀에 꽂으면 투명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투명인간으로서의 기분은 이제 그만 즐겨도 될 것 같다. 나는 이렇든 저렇든 현실 속에 실재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니까 현실을 살아야지.

자,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입니다. 레드썬!



아침식사로 먹은 케이크와 커피. 밤이 맛있다.




내가 듣고 있던 혁오의 Tomboy (유희열의 스케치북) 유튜브 영상을 첨부한다.♪


'일요일 아침'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어김없이 생각나는 Maroon5의 Sunday Morning 영상도 첨부해 본다. ♪



나는 도시인으로서 '비 오는 날'하면 이 그림이 떠오르곤 한다. <Raindrops> by Hiro Yamag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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