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2] 런던살이 기록 열세번째, 전쟁박물관에 가다.

by Daria



런던에서 맞이하는 열세번째 아침의 식사는 소시지를 얹은 일본식 카레 덮밥이다. 남은 카레는 빵에 얹어 먹었는데 역시 내 입맛에는 밥보다 빵이 더 잘 맞는 것 같다.




오늘도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지만 어제보다는 조금 덜 흐린 것 같다. 그래도 역시 나가기 싫은 건 매한가지인데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나가기 싫어도 나가야만 한다. 한국에 있을 때도 약속 있는 주말보다 약속 없는 주말을 좋아했던 나는 이곳에서도 한결같은 취향을 유지하고 있다. 푹푹 내쉬는 한숨과 함께 오늘의 약속을 잡은 과거의 나 자신을 원망하며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은 며칠 전 내셔널갤러리에서 알게 된 영국계 프랑스인 화가와 함께 Imperial War Museum(런던 임페리얼 전쟁박물관)에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이다. 비가 오기는 하지만 강우량이 매우 적어, 오히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덕분에 고즈넉한 운치가 느껴진다.




그 자체만으로도 멋진 박물관 건물 뒤로는 비구름이 뒤섞인 오묘한 라일락 빛깔의 하늘이 신비롭게 펼쳐져 있고, 그 앞으로는 커다란 대포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어 이 모든 삼박자가 한데 어우러져 매우 멋진 분위기를 연출한다.




촉촉이 비에 젖은 정원의 모습이 고요하고 아름답다. 꽃과 풀이 만발한 화려한 정원도 물론 아름답지만 이처럼 차분하고 고요하며 아담한 정원도 참 좋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자마자 천장에 매달린 전투기들이 입장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지만 "크고 멋있다"!




아트샵의 굿즈들이 생각보다 꽤 예쁘더라.




1차 대전부터 순서대로 관람해 보도록 한다. 이 박물관은 단순히 물건들만 전시해 놓은 것이 아니라 전시품 및 역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함께 제공하고 있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여 걸어갈 것 같은 모습을 한 군복 전시를 보는데 가슴팍에 단 꽃을 보는 순간 왜인지 울컥했다.






빅토리아 스타일의 집 미니어처가 전시되어 있는데 함께 관람하던 친구가 본인이 현재 살고 있는 집도 때마침 빅토리안 하우스란다. 할머니, 어머니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아 현재는 자기가 소유 및 거주 중이라고 한다. 오래된 집이라 손수 열심히 보수와 개조를 해오고 있다면서 마치 나에게 집을 팔려는 부동산 중개업자처럼 사진까지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한다.




반으로 쪼개어 내부도 볼 수 있도록 해 두었다.




전쟁에 이용되는 탈것들이지만 그래도 멋있다. 물론 전쟁이라는 행위는 절대 멋있지 않지만 말이다.




나 정도면 soldier로 합격인가...?






무기가 전시되어 있는데 멋있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이 무기에 죽어나갔을 사람들이 떠올라 소름 끼쳤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캠페인을 엿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1차 세계대전 중 Battle of the Somme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전투는 영국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나름의 의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나가는 길 쪽에 군인들의 참호를 재현해 놓은 곳이 있어 다시 한번 더 전쟁의 참혹함을 느껴볼 수 있었다. 이 안에 들어서니 전쟁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참 이상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알차며 의미 있었던 전쟁 박물관 Imperial War Museum. 나처럼 역사에 흥미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이 Imperial War Museum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친구와 함께여서 겨우 1차 세계대전 전시관밖에 둘러보지 못했는데 다음에 혼자 다시 방문하여 2차 세계대전 전시관도 둘러봐야겠다.




그나저나 자신의 빅토리안 하우스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던 그는 결국 나를 집에 초대하고야 말았다. 남의 집이라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지만 정말 예술 영화에서 나올 법한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러블리하며 앤티크한 공간이었다. 깔끔하거나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빈티지한 매력이 있는 공간이었다. 또한, 집안 곳곳에 미술가인 그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걸려있어 마치 화랑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는 아직 액자화하지 않은 캔버스 위 그림을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신기한 경험이었다.




저녁으로 그가 만들어 준 prawn tomato pasta와 질 좋은 와인 두 종류를 마셨다. 라벨을 찍지는 못 해서 어떤 와인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내게 정말 귀한 와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는 와인이었고 지금까지도 이 와인 맛을 잊지 못하겠다. 후식으로 다크초콜릿과 견과류도 먹었는데 어쩜 이 집에서 나오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다 맛있는 걸까? 역시 미식의 나라 프랑스다운 가정이다.




운동을 가야 하므로 일찍이 저녁만 먹고 귀가한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또 먹었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사진으로 찍어놓고 보니 내가 참 잘 먹는구나 생각이 든다.




하루종일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때마침 그쳐 템즈강 러닝을 나왔다. 비가 그친 밤의 런던 풍경은 너무나도 낭만적이다. 이 낭만적인 야경은 매일 보는데도 볼 때마다 사람 마음을 몽글몽글 간지럽게 만든다.




벽에는 수많은 하트와 사랑의 메시지가 빼곡히 수 놓여 있는데 볼 때마다 괜히 살짝 외로워지곤 한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항상 혼자서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때때로는 이 고독에 아주 약간의 권태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물론 그 권태감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사라지므로 대개는 그냥 이 순간을 담담히 흘려보낸다. 그런데 지금은 머나먼 외국에 나 홀로 놓여있고, 강변의 수많은 사람들은 짝을 이루어 저마다의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왜인지 내가 템즈강의 방랑 비둘기가 된 기분이 든다.




길고 길었던 런던의 열세번째 하루가 잿빛 구름 뒤로 서서히 사라져 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1] 런던살이 11~12일차 그리고 첫 선데이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