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겐, 던트북스, 월리스컬렉션, 어니스트버거
오늘의 아침식사 메뉴는 치킨 가라아게와 일본식 카레라이스다.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는 말이 있듯이 닭고기를 튀겼는데 맛이 없을 리가! 없어지는 밥알 한 알 한 알을 아까워하며 그릇을 싹싹 비웠다.
전날 샀던 샌드쿠키도 야무지게 후식으로 챙겨 먹었다. 원활한 장활동을 위한 과채류 섭취도 잊지 않고.
이 샌드쿠키는 맛있긴 하지만 보기보다 꽤 달아서 한 번에 여러 개를 먹기엔 좀 부담스럽다.
정오쯤 되어 집을 나선다. 오늘은 서점 Daunt Books(던트북스)와 박물관 Wallace Collection(월리스 컬렉션)에 갔다가 저녁때 친구와 Honest Burger(어니스트버거)에서 햄버거를 먹을 계획이다. 지나가며 늘 보는 Westminster Abbey와 Big Ben. 오늘은 하늘이 흐릿해서인지 회백색의 웨스트민스터 건물과 묘하게 잘 어우러지는 느낌이다.
평화로운 St. James Park(세인트제임스 공원)를 지난다. 흐릿한 하늘 때문인지 묘하게 이른 새벽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그 와중에 들리는 새 지저귐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동화 속 아침 풍경 같았달까.
Piccadilly Circus(피카딜리 서커스)에 다다르자 커다란 전광판에 띄워진 삼성 광고가 눈에 딱 보여서 찍었다. 한국인으로서 이런 것 보면 그냥 못 지나치지.
지나가다가 "Best Coffee in Town"이라는 문구에 훅 낚여서 들어와 본 골목 안 작은 카페 Hagen Espresso Bar.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나중에 글을 쓰다 보니 알게 됐지만) 전에 자연사박물관 가기 전 들렀던 카페와 같은 브랜드였다. 그런데 그때 마셨던 커피와 꽤 다르게 느꼈던 것으로 보아 역시 같은 원두로도 누가 내리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쌀쌀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노천석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자유로운 모습이 좋아 보여서 추위에 젬병인 주제에 자신만만하게 나도 노천석에 앉아야겠다 생각하고 카페로 향했다.
플랫화이트였는지 코르타도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플랫화이트였을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시나몬번도 주문하고 싶었는데 일요일에만 주문 가능하다고 해서 아쉽지만 다음엔 꼭 일요일에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앙증맞은 라테아트가 올라간 커피 한 잔이 나왔다. 뭘 표현하고자 한 걸까? 호수 위 나뭇잎과 하트 물방울? 작은 컵에 알차게도 그려 넣은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산미가 강한 커피를 좋아하는 내게 Hagen의 커피는 비교적 균형 있는 산미를 풍겼고, 밀크폼도 아주 부드럽고 적당한 온도로 스팀 되어 목구멍을 타고 솔솔 넘어갔다.
야외 노천석에 앉았다가 역시나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도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창문 바로 옆의 바 자리에 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커피를 마셨다. 방문하는 사람들 대개 일회성 방문객보다는 단골손님들이 많은 것 같아 보였다. 런던에 양질의 커피숍이 얼마나 많은데, 계속해서 재방문한다는 건 그만큼 커피가 맛있다는 거겠지.
커피를 다 마신 후 Daunt Books가 있는 Marylebone 구역을 향해 열심히 또 발걸음을 재촉한다. 지나가는 길에 꽃을 파는 구멍가게가 보여 잠시동안 꽃을 살까 말까 고민했다. 한국에 있었으면 크게 고민하지 않고 샀을 텐데 지금은 주머니사정이 넉넉하지 못하니, 그리고 사실 오늘 갈 곳이 많으므로 다시 발걸음을 돌린다. 잠시나마 싱싱하고 예쁜 꽃들을 보아서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메릴본 거리에 도착했다. 정처 없이 걷다가 어쩌다 보니 메릴본까지 이르게 됐을 땐 몰랐는데 작정하고 집에서부터 쭉 걸어와보니 생각보다 거리가 좀 된다.
런던 여행 시 방문할 만한 관광 명소로 언급되곤 하는 서점 Daunt Books는 아름다운 인테리어로 잘 알려져 있다. 서점이 있는 건물 자체로도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데다가 내부는 그만의 독특한 디자인으로 현실과 다른 공간에 들어온 것만 같은 느낌을 주어 서점 투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해 볼 만한 독립서점이다. 또한 이 서점에서 판매하는 굿즈들, 특히 토트백이 정말 예쁘고 튼튼하다.
던트북스의 내부는 이렇게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책을 가장자리에 배치해 두고 높은 천장과 채광을 살려 아기자기한 개성이 느껴진다.
구조뿐만 아니라 스테인드 글라스를 이용한 창문과 빅토리아 스타일의 패턴들이 이곳만의 개성을 이루고 있다.
서점에 왔는데 공간이 너무 예뻐서 상대적으로 책에 관심이 덜 간다.
던트북스의 토트백은 두 가지 크기와 다양한 색깔로 판매되고 있다. 실제로 보면 더 예쁘고, 무엇보다 여느 굿즈들과 달리 던트북스 토트백은 천이 두툼하며 바닥에 힘이 있어 축 처지지 않고 튼튼한 각을 유지하는 편이다. 디자인도 예쁘기까지 하니 개인 소장용으로든 선물용으로든 추천하는 바이다.
던트북스에서 가까운 곳에 The Wallace Collection(월리스 컬렉션)이 있어 서점을 나온 뒤 곧장 이동했다. The Wallace Collection은 Mayfair(메이페어)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Sir Richard Wallace에 의해 기증된 개인 컬렉션을 바탕으로 시작하여 현재의 형태로까지 확장된 곳이다. 프랑스 미술품과 고급품들을 비롯하여 주로 영국 귀족들이 소유했던 예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본다.
들어가자마자 화려한 계단을 중심으로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펼쳐진다. 좌우 대칭을 이루는 계단 인테리어에서 그 건물이 지어지던 조지안시대의 양식이 엿보인다. 뿐만 아니라, 장식적이고 우아하며 화려한 모습에서 로코코 양식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 두 화려함이 만나 아름다운 내부를 이루고 있는 Wallace Collection이다.
각기 다른 여러 개의 방들이 있는데 가장 처음 들어간 방은 강렬한 붉은색과 화려한 가구들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그에 맞춰 그림들 또한 귀족들의 초상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이 악기였던가... 아마도 건반악기였을 것이다. 아무튼 악기마저도 화려함의 극치를 달린다.
굉장히 많은 수의 그림들 중 굵직한 작품들이 꽤 많았다.
귀여운 부자(父子)의 모습을 그린 렘브란트의 작품, 그리고 벨라스케즈의 유명한 두 작품, 또한 역시 유명한 조슈아 레이놀즈의 사랑스러운 소녀 그림도 월리스컬렉션에서 만나볼 수 있다.
소녀의 천진난만한 눈망울과 붉게 물든 오동통한 뺨, 그리고 소중하게 강아지를 끌어안고 있는 앙증맞은 손을 보라.
깨알같이 새겨 넣은 그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가 있는, 디테일이 살아있는 그릇들도 많다.
이별로 인한 사랑의 고통을 표현한 Louis-Léopold Boilly의 그림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저 편지에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 사랑이란 저 편지 종잇장처럼 얇은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변하지 않는 굳건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가끔은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불신과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화려하게 장식된 계단을 오른다.
금빛 액자들이 걸린 파란 벽이 인상적인 이 공간에는 회화 위주로 전시되어 있다.
의자에서 잠이 들어버린 노인의 모습과 어두운 갈색을 활용하여 인생의 무상함을 그려낸 네덜란드 화가 Gabriel Metsu의 작품, 그리고 자신의 긴 인생 동안에 걸쳐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려냄으로써 스스로의 삶의 연대기를 만들었던 또 다른 네덜란드 화가 Rembrandt van Rijn(렘브란트)의 자화상이 눈에 띈다. 이곳에 걸린 자화상 속 렘브란트는 그가 자기 화풍의 정립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며 노력했을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
Francesco di Vannuccio(프란체스코 디 반누치오)에게 귀속되었다고 표기되어 있는, 14세기 이탈리아 시에나 지역의 대표적인 종교화 양식의 성화 <성모와 아기 예수, 성 베드로와 세례자 요한>. 전형적인 금박 배경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왠지 눈길이 가는 매력을 지녔다.
이 크고 화려한 물건은 어느 용도로 쓰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 실용 목적보다는 장식용 물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동아시아 문화예술로부터 매우 짙은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디자인이다. 어쩌면 그쪽에서 수입해 온 물건일 수도 있겠다.
화려한 장식과 소재가 돋보이는 이 단검들은 인도 왕족과 귀족들이 사용하던 단검들로, 실용 무기라기보다는 그들의 권력과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에 가까웠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유럽 왕족이나 귀족 또는 기사들이 입었을 갑옷들도 전시되어 있다.
화려한 커트러리도 볼 수 있다. 난 장식적인 화려한 식기류를 좋아해서 여기 모여있는 이 옛날 식기들이 내 취향에 잘 맞았다.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Wallace Collection(월리스컬렉션) 건물 내부에 위치한 카페를 하나 발견했다. 층고가 높고 분위기가 좋아 보여서 조만간 방문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찜해두었다. 이 날은 폐점 시간이 임박하여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저녁은 친구와 함께 버거를 먹기로 약속해 두어서 식당으로 향했다. 박물관에서 나오니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우산이 없어서 그냥 맞고 갔다. 목적지는 박물관과 도보 20분 정도 떨어져 있었고, 비에 젖은 몸은 추위에 너무나도 취약했다. 나는 식당을 향해 오들오들 떨며 찰박찰박 물웅덩이를 밟고 나아갔다.
드디어 사막 속 오아시스처럼, 오늘의 저녁 장소, Honest Burger(어니스트버거)가 나타났다. 사실 친구와 약속한 시간은 꽤 많이 남았지만 Wallace Collection이 일찍 문을 닫았고, 우산도 없는 형편에 비는 내리고, 주머니 사정은 넉넉지 못하여 그냥 식당으로 와 버렸다. 내 친구가 잠시 후에 여기로 합류할 건데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려도 되냐고 직원에게 물어보니 흔쾌히 허락하며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빈 식탁에서 홀로 친구를 기다린 지도 꽤 시간이 흐르고 난 후, 눈치가 보이는 나는 결국 먼저 음식을 주문하기로 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 달에만 먹을 수 있다는 한정메뉴인 트러플라끌렛 버거에 관심이 갔고, 직원에게 물어보니 치즈도 많고 강력 추천한다고 하기에 Truffle Raclette Classic Beef Burger로 주문했다.
내 버거를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행히 친구가 도착했다. 어쨌든 내 음식이 그녀의 음식보다 먼저 나왔고, 민망하지만 나 홀로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감자 요리로는 실망할 일 없는 런던답게 감자튀김이 맛있다. 저 많은 양의 감자를 하인즈 마요네즈와 케첩에 찍어 몽땅 먹어 치웠다.
버거는 직원이 치즈가 듬뿍 들어 있다고 말한 것 치고는 좀 빈약한 양의 치즈를 품고 있었지만 어쨌든 맛은 있었다. 그렇지만 원체 내가 햄버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그런지 딱히 인상 깊은 맛은 아니었다. 같이 식사한 내 친구는 (나와 다른 메뉴를 주문하긴 했지만) 매우 맛있다고 했으니 아마 내가 버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탓일 거다. 그래도 그릇은 깨끗하게 싹싹 비웠다.
어니언링에서는 새우튀김 맛이 났다. 좋은 의미이다. 양파를 감싼 튀김옷이 매우 빠작빠작하며 스파이시했다.
고열량, 고지방의 식사를 마친 후 양심상 걸어서 집에 돌아왔고,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이어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헬스장으로 향했으나, 한창 걸어가던 중 오늘은 일요일이라 헬스장이 일찍 문 닫는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떠올렸다. 터덜터덜 빗속을 헤치고 도로 집으로 걸어가는데 때마침 나의 플레이리스트가 ‘If I were a fish’라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정말이지 멍청한 물고기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 곡은 오히려 높은 자존감을 노래하고 있지만, 난 이 상황에서 그저 “If I were a fish”라는 문구에만 꽂힌 것이다. 오늘 저녁때 친구와 고열량의 식사를 할 것은 일찍이 확정된 일이었고, 따라서 귀가 후 헬스장에서 지방을 연소시킬 계획을 품고 있었는데 바보같이 헬스장 문 닫는 시간을 깜빡하여 그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결국 나는 많이 먹고 운동은 안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자책감이 조금 들었지만 곧바로 “이런 수퍼돼지 같은 날도 있는 거지 뭐”라고 생각을 바꿨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이니 오늘 하루쯤 페이스 조절에 대실패 했다고 하더라도 내일부터 다시 보통의 페이스를 찾아가면 될 것이다. 런던에 머무는 동안 통제력 강한 나의 J적 성향이 많이 누그러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좋은 의미이다. 인생에는 매 순간 수많은 변수가 개입하는데 강한 통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이 변수들을 통제하고자 시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타고나길 통제 과정, 즉 계획 수립과 이행을 즐기는 성향이지만, 그래도 통제에 실패하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이 조금씩 완화되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마도 눈앞에 당장 데드라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장기 여행자라는 처지에서 오는 심적 여유 때문이겠지. 뭐가 됐든 내 안에서 좋은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좋은 것들 보고 맛있는 것 먹으며 보낸 하루, 오늘도 알차고 보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