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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런던일상 - 풍성히 채워지는 영혼의 양식창고

페이스갤러리, 월리스컬렉션, 국립초상화갤러리

by Daria



오늘의 아침 식사는 간장찜닭과 육개장, 숙주나물볶음과 함께 했다. 나는 찜닭을 볼 때마다 항상 찜닭에 단단히 미쳐 있었던 대학생 시절이 떠오른다.




너무 달아서 하루에 한두개씩만 먹었더니 아직도 남아있는 쿠키이다. 빨리 다 먹어야 다른 쿠키를 사 올 텐데 말이지. 마치 핸드폰이 빨리 고장 나서 새 폰을 사게 되길 바라며 핸드폰을 막 굴리는 마음과 같달까....

토마토엔 꿀을 뿌려 먹었다. 어제 Sainsbury's에서 사 온 꿀인데 우리나라 꿀과 달리 특유의 꿀 향이 없고 질감이 꾸덕꾸덕하여 여기저기 펴 발라 먹기 좋고 입맛에도 훨씬 잘 맞는다. 룸메이트도 먹어보곤 한국 꿀보다 훨씬 맛있다고 했다.




오늘은 Marylebone 동네에 갈 것이므로 Thames 따라 이어지는 길 말고 St. James Park를 통하는 길로 간다. 그리고 이 쪽 길이 비교적 한적해서 더 좋기도 하다. 템즈강 따라 이어지는 길에는 빅벤이 있어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아마 길 가다 찍혀버린 불쌍한 내 모습이 수많은 사진들 속에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달갑지 않은 일이다.




산책로에 놓인 공유자전거 한 대가 꼭 오브제처럼 놓여있다. 배경이 아름다우니 평범한 자전거도 오브제처럼 보이는 효과가 생긴다. 뽈뽈거리며 바닥을 돌아다니는 비둘기도 왠지 귀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한테 다가오거나 날아들지만 않으면 제법 봐줄 만한데 말이지... 저번에는 비둘기가 내 머리를 때리고 간 적도 있다.)




오늘의 첫 번째 방문지는 Pace Gallery(페이스갤러리)이다. 페이스갤러리는 미국 보스턴에서 시작된 현대미술 갤러리인데 보스턴뿐만 아니라 뉴욕, LA, 런던, 서울 등 세계의 여러 곳에 지점을 두고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내가 방문했던 때에는 Acaye Kerunen의 단독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Kerunen은 우간다 출신의 예술가로, 전통적인 직조 및 염색 기법을 예술에 녹여내어 여성의 권리와 환경 지속 가능성, 식민주의적 구조에 대한 저항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주로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전시의 규모가 크지는 않아서 둘러보는데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다음 The Wallace Collection으로 향하는 길에 Moco Museum을 보았다. Moco Museum 또한 세계적인 유명 현대미술관이다. 유리창에 쓰인 바와 같이 Banksy(뱅크시), Keith Haring(키스해링), Yayoi Kusama(쿠사마 야요이), Andy Warhol(앤디워홀), Jean-Michel Basquiat(바스키아), Damien Hirst(데미안 허스트), Kaws(카우스), Jeff Koons(제프 쿤스) 등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법한 유명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참고로 모꼬뮤지엄은 유료 입장이다.



Moco Museum은 다음을 기약하고 오늘은 The Wallace Collection을 다시 방문하였다. 지난번에 이은 재 방문이다. 오늘은 작품 관람뿐만 아니라 월리스 내 카페 The Wallace Restaurant에도 가 볼 계획이다.




작품은 한차례 본 바 있으니 오늘은 우선 카페로 곧장 향하였다. 언제나 방문객이 많은 것을 보면 맛이 아주 좋거나 분위기가 아주 좋거나 둘 중 하나겠지...?




메뉴판은 아래와 같다. 가성비가 좋은 카페는 아니지만 박물관 안에 있어서 쾌적하고 분위기가 좋은 편이다.




나는 늘 그렇듯 오늘도 홍차와 스콘을 주문했다. 따뜻한 스콘 두 덩이가 클로티드크림, 딸기잼과 함께 제공된다. 혹시나 해서 만져본 찻주전자의 뚜껑 꼭지는 예상한 대로 아주 뜨거웠다. 미리 온도를 확인하길 잘했다. 이제 찻주전자에 더는 바보처럼 데이지 않는다고...!!




사실 어느 블로거가 The Wallace Restaurant의 스콘이 런던에서 먹은 스콘 중에 가장 맛있었다고 쓴 글을 읽고 스콘 덕후로서 안 먹어볼 수 없다는 사명감과 호기심으로 방문하게 된 것인데, 그분의 취향과 나의 취향은 조금 달랐나 보다. 나에게는 그저 그런 스콘이었다. 따뜻하게 나오는 점은 정말 좋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런던에서 방문한 수많은 상점들 중 유일하게 불친절했던 곳이 바로 이 The Wallace Restaurant라는 것이다. 사람을 특정 집단으로 분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나 또한 절대 그러고 싶지 않지만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이 없어서 조심스레 이분법적인 표현을 빌려 보겠다. 이곳은 자국민으로 보이는 직원들이 비교적 더 책임 있는 역할을 맡고 있었고, 이민 계통으로 추정되는 직원들은 주로 서빙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내게 자리를 안내해 주고 주문을 받아준 전자의 직원들은 매우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후자의 직원들은 음식 서빙이나 계산, 물 채워주기와 같은 간단한 응대에서도 다소 퉁명스럽고 무심하게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나의 계산을 진행해 주었던 직원의 태도가 특히 인상 깊었는데, 미국식 영어에 조금 더 익숙한 내가 무의식적으로 "Could I get a check, please?"라고 이야기하자 그 직원이 비아냥대는 말투로 "Bill."이라고 맞받아쳤다. 그 순간에는 불쾌할 겨를도 없이 바로 "Yes, bill please."라고 대답했는데 그 직원이 지나가고 난 후 곧바로 불쾌감이 밀려왔다. 이에 대해서 어떠한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공통된 태도를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기 일에 대해 불만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던 그들은 어쩌면 업무 환경이나 처우가 좋지 못함에 따른 외부적 요인들에 의해 그렇게 변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한결같이 상냥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계산은 나중의 일이었고, 어쨌든 머무는 동안 높은 유리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환한 빛 아래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었다. 케이크도 먹고 싶었는데 집에서 과식하고 나왔으니 꾹 참았다.




방문객은 쉴 새 없이 들어왔고, 바쁜 카페에 혼자 계속 머무르는 것도 다소 눈치가 보여 오래 지나지 않아 카페를 나와 전시 공간으로 향했다. 과거 영국 귀족 Sir Richard Wallace의 저택이었던 만큼, 고풍스럽고 아늑한 인테리어가 매우 돋보이는 박물관이다.




계단을 올라오니 서로 껴안고 있는 아기 천사 두 명의 석상이 눈에 띈다.




오늘 나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그림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Pieter de Hooch가 그린 따뜻하고 평화로운 가정 풍경이다.




평화롭고 목가적인 전원 풍경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작품의 제목에서 추측할 수 있다시피 그리스 신화 속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아버지 크로노스의 식인 행위를 피해, 어머니 레아에 의해 Mount Ida(이다 산)으로 보내진 제우스가 요정 그리고 염소들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는 이야기 말이다.




지나가다가 이 잘생긴 청년은 누구야 하고 걸음을 멈추고 보니 Paris였다. Anthony van Dyck의 <The Shepherd Paris>이다.




그림을 보는 이들도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초상화들을 그려냈던 네덜란드 화가 Frans Hals(프란스 할스)의 <The Laughing Cavalier>이다.




다음은 Eugene Delacroix(유진 들라크루아)의 <The Execution of Marino Faliero>. 팔리에르의 처형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계단을 배치함으로써 극적인 감정의 단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회화 작품들 위주로 꼼꼼히 감상을 마친 후 박물관을 나왔다. 들어오기 전에도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여전히 그치지 않은 걸 보면 오늘 하루 종일 이렇게 비가 내릴 모양이다.




중간중간 상점에도 들르고 이것저것 구경하며 메릴본에서부터 트라팔가광장 방향으로 쭉 걸어 나왔더니 어느덧 또 이렇게 바깥이 깜깜해졌다. 곧장 집으로 가기에는 조금 아쉬운데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우산은 없어 National Portrait Gallery(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길거리 버스킹을 하는 남성. 목소리가 좋다.





가장 먼저 마주한 전시 공간은 자화상을 다루고 있었다. 셀카가 보편화된 현대에 '자화상'이라는 것이 어떠한 의의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화두를 던지며 전시는 시작된다. 오른쪽 그림은 Eileen Agar의 자화상으로, 어딘가 앙리마티스를 떠올리게 한다. 색깔과 인물의 자세 때문일까? 아무튼 그녀의 자신감과 당당함이 엿보이는 그림이다.




제목이 독특한 이 그림은 Hockney Pillow를 베고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R. B. Kitaj의 자화상이다. 키타이는 호크니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로 두 사람은 친구이자 동료 사이였다고 한다.




"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상자 속에서 제 자신을 조금씩 끄집어내는 것과 같았습니다."라고 말하는 Lucy Jones의 자화상이다. 그가 선택한 색깔과 붓터치들이 그의 내면의 불안, 갈등을 드러내는 듯하다.




역시나 인상적인 색깔과 불안한 눈빛, 왜곡된 형태가 인물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명확하게 담고 있는 듯 보이는 이 작품은 영국 화가 Julian Trevelyan의 자화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려졌다는 안내문의 내용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보자마자 작가의 아픈 심리가 직접적으로 와닿은 강렬한 이 그림은 Raqib Shaw의 <The Final Submission in Fire on Ice>이라는 작품이란다. 안내문에 따르면 Shaw는 2021년 사별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그림 속 숄을 포함하여 자신의 여러 물품들을 불태웠는데, 특히 이 숄은 가문의 가보이자 고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물 옆에 놓인 어린아이 석상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고 그 뒤로는 울타리가 부서져 있다. 그림 한가운데 활활 타오르는 불과 대조적으로 장소적 배경은 추운 설원이다. 직관적으로 인물의 심리가 느껴지는 인상 깊은 그림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호크니의 화풍이 대번에 느껴지는 이 그림은 실제로도 David Hockney의 작품이 맞으며, 절친 Charlie Schelps와 자기 자신, 그리고 관람자 사이에 삼각형의 시선 구도가 형성되도록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호크니는 인간 간의 관계를 더 밀접하게 만들고, 서로 간의 차이를 없애며, 결국 모든 사람이 하나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그 생각의 일환으로 그려진 작품 중의 하나가 이것이라는 의미이겠지?




영화 해리포터 속 맥고나걸 교수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배우 Maggie Smith를 그린 James Lloyd의 작품이다. 배우 매기스미스가 아닌 보통의 인간 매기스미스를 표현하고자 한 것 같은 매우 수수한 그림이다.




인물의 복합적인 성격을 두 겹으로 나타내고 있는 듯한 이 그림은 Howard Tangye가 자신과 깊은 친분을 맺고 있던 Richard Nicoll이라는 유명 패션디자이너를 그린 작품이다. 인물의 복합성을 섬세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을지 짐작이 간다.




현대적이고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영국 건축가 David Chipperfield 경을 그린 Humphrey Ocean의 작품이다. Ocean 역시 미니멀한 화풍의 소유자로, 그림의 모델과 닮은 점이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안내문에 따르면 Chipperfield는 "I don’t care how a building looks if it means something, not to architects, but to the people who use it(그것이 건축가들에게가 아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면 저는 건물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상관없습니다)."라는 말을 한 바 있다고 한다. 인간 중심적이고 기능 중심적인 그의 건축 철학이 드러나는 문장이다.




전시실에 붙은 이 이름들은 아마도 후원자들의 이름을 딴 것이겠지..?




다음 전시 공간은 여성 참정권 운동과 관련된 곳인 듯하다. 오른쪽 그림 속 인물은 20세기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끌던 Christabel Pankhurst이다.




20세기 대표 문학가이자 여성주의 문학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Virginia Woolf의 초상화이다. Vanessa Bell이 그렸으며, Bell은 그녀의 언니이다. 그림 속 울프의 눈을 흐릿하게 표현함으로써 그녀의 내면의 창작성에 초점을 맞추어 그려내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자마자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은 이 그림은 Frank Auerbach의 작품으로, 물감을 겹겹이 쌓아 올림으로써 회화에 조각(sculpture)과 같은 성질을 부여하였다. 그는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수도 없이 그림을 긁어내고 다시 쌓아 올리기를 반복하며 'hundreds of transmutations(수백 번의 변형)' 과정을 거쳤고, 이를 통해 모델의 정신적 본질을 깊이 탐구하고자 하였음을, 안내문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었다.




영국의 유명 시인 John Keats를 그린 이 초상화는 우수에 찬 듯한 맑은 눈망울과 표정을 통해 키츠의 섬세하고 감성적인 성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은 보자마자 재밌어서 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상화 미술관의 마감시간이 되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퇴장한 나는 귀갓길에 잠시 Waterstones에 들러 책 쇼핑을 하였다.




사고 싶은 흥미로운 책들이 여러 권 있었다.




그렇다. 나는 왜 이렇게 (많이) 먹는 걸까.

나한테 필요한 책인 것 같은데...?


Why we eat (too much)



"Why we eat too much"에 찔린 지 30분도 안 되어서 이렇게 집에 돌아와 치즈와 빵을 먹는 나이다. 하지만 먹는 건 너무 즐거운 일인걸요.




아까는 제법 굵직하게 내리던 비가 밤이 되자 얕은 비로 잦아들어 러닝을 나왔다. 이 정도 내리는 비쯤은 얼마든지 맞으면서 달릴만하다. 맑고 투명한 밤하늘 아래의 템즈강 풍경도 좋지만 잿빛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 아래의 템즈강도 분위기 있고 좋구나.




오늘은 하루동안 Pace Gallery, The Wallace Collection, National Portrait Gallery 총 세 곳을 방문했다. 많은 양의 예술작품들을 접했더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다. 하지만 소모된 체력과 반비례하여 영혼의 양식 창고에는 꽤 넉넉한 양의 곡식을 채운 것 같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아쉬운 생각이 들지 않도록 런던에 있는 동안 필사적으로 예술 작품들을 즐기고 있는데, 매일 하루하루를 이렇게 예술로 가득 채우고 있으니 삶이 한층 더 풍요로워지는 것은 물론이요, 삶을 좀 더 귀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 이렇게 런던에서 보내고 있는 시간들이 내 인생 전체에 있어서 귀중한 배움의 기회이자 경험이 될 것이라는 데에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밤하늘 아래 잔잔하게 일렁이는 강 물결을 보며 생각한다.

비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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