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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Oct 15. 2023

행운아의 한강 산책

A. Dvorak | Songs My Mother Taught Me



오늘은 안과 검진 일정이 있어서 토요일임에도 이른 아침부터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닫힌 창문 너머로 아침 창 밖을 보니 하늘과 땅의 빛깔만 봐도 습한 기운이 한껏 느껴졌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로선 이제 더이상 눈치게임이고 뭐고 캐시미어 니트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겠다. 날이 쌀쌀하고 흐리니 옷이라도 화사하게 입어 보고자 라벤더색 캐시미어 니트와 청바지를 입고 연분홍색 실크 스카프를 맸다.

화사한 옷은 기분도 화사하게 만들어준다.



병원 가는 길, 지하철에 탔는데 같은 객실에서 귀여운 부자(父子) 한쌍을 보았다. 평범한 부자였지만 왜 귀여웠는가 하면 바로 그 아들 때문이었다. 소년의 양 뺨에는 사춘기의 상징과도 같은 여드름이 들판 가득 핀 코스모스처럼 피어 있었고 어깨도 다부지게 벌어진 것으로 보아 최소 중학생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내 아버지 곁에서 팔짱을 낀 채 꼭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보통의 남학생들은 사춘기 청소년기쯤 되면 부모님과의 스킨십을 어색해하기 마련인데 이 부자는 둘의 사이가 여간 다정한 것이 아닌가 보다. 보는 나의 입가에 절로 미소 지어지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대기시간까지 포함하여 장장 세 시간이 넘는 검진을 끝내고 나니, 든든하게 먹었던 아침밥도 모두 다 소화되어 사라지고 속이 헛헛했다. 1층 로비 바깥으로 나오니 비도 쏟아지고 있었다. 일기예보에 예고되어 있던 낮은 확률의 비 소식에 집을 나설 때 고민하다가 장우산을 챙겨 나왔는데 우산을 챙겨 온 보람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우산을 챙겨 외출했는데 그날 비가 오지 않으면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든단 말이지…. 그것이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장우산이면 더더욱…! 오늘은 다행히도 억울한 날에 당첨되지 않았다.


검진 끝나면 가려고 봐뒀던 근처의 카페가 있어서 그곳에서 케이크와 커피로 요기를 했다. 그 카페의 음식이 절대 맛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상 깊을 정도로 맛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분위기가 별로인 것은 아니었지만(오히려 좋은 편이다) 내 취향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의 방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만족스러운 공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런 공간이기도 하다. 그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런 공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주 만족스러운 공간이 된다.




오늘의 내 계획은 안과 검진 후 카페에서 점심 요기를 하고 한강변을 따라 산책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긴 하지만 우산을 쓰고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내가 공원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쨍한 햇빛이 비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던 한강 공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조용하고 평화로웠으며, 구름의 장막을 걷고 고개를 내민 태양은 제 존재감을 호소하려는 듯 필사적으로 햇살을 내뿜었다. 그 덕에 무성한 녹색 잎사귀들은 황금옷을 입은 것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참새들은 그친 비에 신이라도 난 것인지 종알종알 지저귀며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바삐 날아다녔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동화 속 풍경처럼 매우 몽환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비가 개고 난 후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강변 풍경.


이런 장면을 누리며 걸을 수 있다니! 이곳의 나는 정말 행운아다.

또한, 이러한 아름다운 순간의 모든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본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신체 기능이다. 죽는 그날까지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두 눈으로 제대로 보다 가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 당장 스마트폰은 그만 들여다보고 내 눈을 소중히 돌봐 줘야지.

아, 물론 오늘 안과에 다녀왔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 건강한 눈에 세상의 예쁜 모든 것들 차곡차곡 담아 저 세상 가자고요. :D




오늘따라 드보르작의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가 듣고 싶었다.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는 드보르작이 아돌프 헤이듀크의 시 일곱편에 곡을 붙인 가곡집 <집시의 노래, OP.55, B.104> 중 네번째 곡으로, 드보르작의 가곡들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을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곡이다.

살아생전 슬하에 여러 자식을 두었지만 그 중 몇명은 어린 나이에 절명하여 슬픔에 잠기기도 했던 드보르작. 가족과 고향을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그가 이 곡을 써내려가는 동안, 일찍이 세상을 떠나버린 자식들 생각 그리고 어머니 생각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지 감히 짐작해 본다.


나는 좋은 것들을 보면 꼭 우리 엄마가 생각난다. 나뿐만 아니라 엄마의 눈에도 세상의 예쁜 것들을 가득 담아 드려야지.

드보르작의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를 들으며 한강의 풍경을 바라본다.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Ernestina Jošt가 노래하고 Gimnazija Kranj Symphony Orchestra(conductor:Nejc Bečan)가 연주하는 A. Dvořák의 <Songs My Mother Taught Me(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 영상을 첨부한다.♪




평화롭고 예쁜 강 풍경을 보며 생각난 작품 <The Seine at Asnieres> by Pierre-Auguste Ren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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