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파란 하늘 그리고 진한 커피와 함께 런던에서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아침 식사는 통통한 소시지를 얹은 카레라이스다. 은은한 단맛이 감도는 짙은 풍미의 카레 소스 때문에 배부른 줄 모르고 밥이 술술 들어가 오늘도 어김없이 과식을 하고야 말았다.
오늘도 후식과 함께 빈둥빈둥, 사육장의 여유로운 돼지와 같은 오전 한때를 보냈다.
오늘은 켄싱턴 동네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 에든버러 여행 둘째 날에 사귀었던 그 친구가 볼일이 있어 런던에 오는데 때마침 저녁 일정이 빈다고 하여 만나기로 했다. 친구와의 약속은 늦은 오후에 예정되어 있어 그전까지 홀로 Kensington Gardens(켄싱턴가든스) 산책도 하고 Kensington Palace(켄싱턴 궁전)도 둘러보기로 했다.
한 청년이 쿨하게 보드를 타며 슝 지나간다.
팻말을 따라 공원 옆쪽으로 난 오솔길을 걸어 들어가면 켄싱턴 궁전을 만날 수 있다. 궁전 옆에는 왕세자비 다이애나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연못 'Diana, Princess of Wales Memorial Fountain'이 있다. 다이애나비를 기리는 상징적인 공간답게 그녀의 성향을 표현하는 의미로 연못의 물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탄하게, 또는 거칠게 흐르는 구간도 있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켄싱턴 궁전 입장 시 24파운드의 입장료를 내고 티켓을 구매해야 하는데, 온라인 예매를 하지 않았다고 하니 입장 시간이 마감되었다며 다음에 다시 오란다. 뭐... 그렇게 엄청 방문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켄싱턴 궁전에는 못 들어가게 됐다. 친구와 만나기 전까지 궁전에서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는데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겠다.
그러던 중, 살짝 멀리 떨어진 곳에 예쁜 외양의 The Orangery(오랑주리 티룸)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애프터눈티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 좋을 것 같아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곳 또한 자리는 만석이었으며,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공식 홈페이지 안내에 따르면 16:30이 주문 마감이란다.) 두 번째 계획 또한 실패한 나는 켄싱턴 궁전 일대를 그만 떠나기로 했다.
춥기는 했지만 매우 화창하여 공원 일대를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어느덧 낮게 내려오기 시작한 햇살이 잔디밭의 푸른 빛깔을 마치 금빛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추운 겨울 날씨에도 이렇게 가벼운 옷차림으로 뛰노는 모습을 보면 영국인들은 참 강한가 보다. 러닝할 때도 나는 패딩 잠바를 입고 목도리까지 두르고 뛰는데 런더너들은 얇은 반팔에 반바지만 입고 뛴다. 추운 공기에 노출된 그들의 시뻘게진 살갗을 보아선 추위를 못 느끼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들의 속마음이 궁금하다. "혹시.. 지금 저만 추운 건가요...?"
켄싱턴가든스 인근에 있는 The Design Museum(디자인박물관)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하여 공원을 걸어 나와 곧장 이동하였다.
갖가지 디자인의 역사를 보여주는 이 디자인뮤지엄은 상설전시뿐만 아니라 특별전시도 선보이고 있으며, 박물관 규모가 아주 크지 않아 부담 없이 둘러볼 수 있으니 디자인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추천할 만한 곳이다. 친구와 함께 있어서 전시 내부 사진을 찍지는 못 했지만, 방문에 참고가 될 만한 공식 홈페이지 링크를 첨부해 둔다. (https://designmuseum.org/)
박물관을 나온 뒤, 친구와 함께 인근의 Whole Foods Market 내 카페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수다를 떨었다. 커피와 함께 마들렌을 먹었는데, 별로 맛없게 생겨서 기대도 안 했건만 (친구가 맛있다고, 자기 말을 믿어보라고 해서 먹게 되었다) 의외로 촉촉하고 포슬포슬한 것이 꽤 맛있어서 내가 한 상자의 절반 이상을 먹어 버렸다.
그 후 튜브를 타고 Mayfair 동네로 넘어온 우리는 가벼운 음주를 하기 위해 한 바(Bar)를 찾았다. 그 친구가 런던에 오면 자주 방문하는 곳이라며 자신 있게 안내한 이곳은 Le Magritte Bar라는 이름을 가진 칵테일바로, The Beaumont Mayfair 호텔 로비 층에 자리하고 있는 아담한 규모의 공간이다. 사람들이 많아 북적북적했지만 그리 시끄럽지 않았고 제법 아늑했으며 대화를 나누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다른 안주 없이 와인만 주문하였는데, 기본 안주로 그린올리브가 제공된다. 올리브는 무척 짜서 절로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였다. 바의 분위기는 좋았지만 그에 비해 서버의 서비스는 그리 훌륭하지 않다고 느꼈다. 너무 바쁜 탓일까.
나는 늦은 시간까지 집 밖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친구 또한 에든버러로 돌아가는 코치를 타야 해서 우리는 오래지 않아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이곳에서 집까지는 도보로 약 45분 밖에 안 되는 거리라 먹은 것을 소화시킬 겸 걸어서 귀가하기로 했다. 가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식당 상호명이 너무 웃겨서 사진을 찍었다. Sexy Fish라니...!
세인트제임스 공원에서 작은 다리를 지나는 동안 저너머로 반달 모양의 런던아이가 마치 노을처럼 까만 밤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태양빛에 붉게 물드는 세상처럼, 런던아이빛에 세상이 붉게 물들고 있다.
발이 꽁꽁 얼어 고되게 느껴질 때쯤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정문이 우뚝 나타났다.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이 나타날 정도면 이제 정말로 집에 다 왔다는 의미이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홍차로 꽁꽁 언 몸을 녹였다. 고작 이틀간 머문 여행지에서 우연히 사귄 친구와 며칠도 되지 않아 이렇게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새삼 인연이란 것은 참 예측하기 어려운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인연이 닿을지 모르는 일이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갑자기 인연이 끊어질지 모르는 일이니 또 한편으로 인간관계는 참 불가사의하게 여겨지기도 하다. 나는 맺어지는 '인연'에 대하여 조금 더 깊은 의미를 두는 편인데, 그 말인즉슨 인연을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맺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이렇게 나의 인연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이상, 앞으로 함께 좋은 우정을 이뤄나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