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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에든버러에 오길 잘했다.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서점, 빅토리아거리, 로열마일

by Daria


https://brunch.co.kr/@myhugday/124

(*전편에 이어지는 이야기)



을씨년스러운 날씨 속 에든버러의 신비로운 풍경을 즐기며 천천히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겨우 오후 네시밖에 안 되었는데도 이리 어둑어둑하다.




언덕 아래로 내려오면 National Gallery of Scotland(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가 있다. 런던에 있는 National Gallery를 생각하면 그보다는 조금 더 아담한 규모의 미술관이다. 하지만 그 안에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 컬렉션은 매우 훌륭했다. 솔직히 입장하기 전에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 미리 알아본 정보도 전혀 없었고, 단순하게 "나는 미술을 좋아하니까 대표 미술관은 꼭 가 봐야지"라는 생각으로 방문한 것인데 생각지도 못한 양질의 미술 소장품에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유럽 미술관답게 역시 성화의 비중은 꽤 높은 편이고, 이 미술관 또한 작품 옆에 간단한 작품 설명문을 나란히 두어 누구나 미술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강렬한 붉은색 벽에 걸린 수많은 성화들 중 가장 먼저 El Greco(엘 그레코)의 <세계의 구세주>라는 작품을 기록해 본다. 그림 속 그리스도는 마른 체형을 지니고 있으며, 오른손을 들어 올려 축복을 내리는 듯 한 제스처를 취하였고, 왼손은 세상을 상징하는 투명한 구체 위에 두고 있다. 그림 속 인물이 정면을 응시하는 이 직접적이고 엄숙한 표현 방식은 엘 그레코의 고향인 Crete(크레타)의 비잔틴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고 안내문은 설명하고 있다.




El Greco(엘 그레코)의 또 다른 작품 <우화>이다. 엘 그레코가 남긴 드문 수의 세속적 작품 중 하나로, 그림에 담긴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한다. 그림 속에서 불을 붙이고 있는 소년의 행위는 감각적 욕망에의 자극을 암시하고 있을 수 있다. 원숭이는 미술에서 종종 악, 비행을 상징하며, 옆에서 바보같이 웃고 있는 남성은 우매함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종합해 보자면, 이 그림은 '욕망은 인간의 어리석고 본능적인 충동을 자극한다'는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는 작품일 수 있다고 안내문은 설명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Nicolas Poussin(니콜라 푸생)의 <반석을 치는 모세> 작품이다. 하나하나 디테일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이 작품은 Titian(티치아노)의 <인생의 세 단계>로, 인생과 사랑의 덧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평화로운 전원 풍경 속에서 아직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를 순수한 아기들이 잠들어 있고, 이 위를 사랑의 신 Cupid(큐피드)가 장난스럽게 짓밟고 있다. 왼편의 젊은 연인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깊은 사랑에 빠져 있고, 그 뒤로 한 노인이 죽음과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는 듯 두 개의 해골을 바라보고 있다. 한편 이 쓸쓸한 분위기의 배경에는 교회를 그려 넣음으로써 분위기를 완화시키고 구원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크기로 우선 압도하는 이 그림은 Hugo van der Goes(후고 반 데르 구스)의 <삼위일체 제단화>로, 스코틀랜드에서 현존하는 제단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한다. 에든버러의 Collegiate Church of the Holy Trinity를 위해 제작되었으며, 의뢰자는 성당의 초대 주임사제였던 Edward Bonkil이라고 한다. 이 성당은 현재 Waverley(웨이벌리) 역 부근에 위치했으나 1848년 철거되었단다. 내가 왼쪽 패널만 사진을 찍었지만 이 작품은 소실된 중앙패널과 함께 세 폭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사진에 해당되는 왼쪽 패널에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3세와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인 Saint Andrew(성 안드레아), 그리고 왕의 아들 제임스가 그려져 있다. 사진에 없는 오른쪽 패널에는 스코틀랜드 왕비였던 Margaret of Denmark와 Saint George(성 조지)가 그려져 있다. 소실된 중앙 패널에는 성모 대관식 장면이 그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으며, 이는 종교개혁 기간 중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당시 피렌체에서 인기 있었던 원형 구도의 회화 양식이 잘 드러난 이 작품은 Raphael(라파엘로)의 <야자나무와 성가족>이다. 라파엘로가 이 운형 구도를 강조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의 배치를 세심하게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이집트로부터 귀환하던 성가족이 어린 시례 요한과 만나는 전설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이 작품은 당시 높은 평가를 받아 여러 차례 복제된 바 있을 정도인데, 실제로는 라파엘로가 직접 그린 것이 아니고 그의 유능한 조수 Gianfrancesco Penni가 주로 작업을 도맡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Leonardo da Vinci(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실타래를 든 성모>. 작품 속 예수는 십자가 모양의 실타래를 응시하고 있는데, 마치 미래에 겪게 될 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그 옆의 성모 마리아는 온화한 표정과 망설이는 듯한 제스처를 함께 취함으로써 해당 장면에 대한 감동을 더한다. 안내문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기는 것으로 유명했고, 이 작품에 대한 다빈치의 참여 정도에 대해서 역시 학자들 사이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디자인과 인물, 바위 묘사 등은 그가 직접 작업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 작품은 2003년 Drumlanrig 성에서 도난당한 바 있으나 다행히 2007년에 회수되었단다.




캔버스에 템페라라는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작업된 이 그림은 Sandro Botticelli(산드로 보티첼리)의 <잠든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성모>이다. 당대의 종교화는 일반적으로 목판을 사용하여 그려졌으나, 이 작품은 캔버스를 이용하는 드문 방식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13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 그려진 템페라 및 도금 양식의 이 작품은 <성 에프레미우스의 죽음과 수도자들의 생애 장면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삼중 제단화이다. 금박의 화려함이 돋보여 실제로 보면 훨씬 멋있다.




화가로 활동하며 오랜 세월 동안 자화상을 통해 인생을 기록해 왔던 화가 Rembrandt van Rijn(렘브란트 반 레인)의 <자화상>도 만나볼 수 있다. 그의 수많은 자화상들 중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인생에서 특히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그려졌으며, 당시 그는 개인적인 고난과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려 파산 선고를 받음은 물론이고 그의 재산 상당량을 팔아야 했다고 한다. 그림 속 인물의 표정에서 당시의 심리가 선명히 느껴진다.




전시실 공간의 분리와 함께, 이어질 1590-1720년 사이 네덜란드 및 플랑드르 미술에 대한 설명이 게재되어 있다.

안내문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588년 북부 네덜란드가 독립을 하면서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고 암스테르담은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미술이 급격이 발전했으며, 다양한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됐는데,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등의 특정 장르가 특화되었고, 대부분의 그림은 작은 크기로 제작되어 집 안에 전시되곤 했단다.




<촌마을 결혼식> 장면을 그린 Jan Steen(얀 스틴)의 작품이다. 얀 스틴의 작품은 서정적이고 소박하며 장면의 디테일이 살아있어 찬찬히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한, 그의 작품은 풍자적인 요소나 도덕적인 메시지를 품고 있어 더 깊이 살펴볼수록 더 재미있다.




Jan Steen(얀 스틴)의 또 다른 작품 <소년과 소녀의 학교>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혼란스러운 교실을 가볍게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규율 없는 학교에서의 주의력 부족이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안내문은 설명하고 있다. 그림의 도덕적 교훈은 다음 두 가지 특징을 통해 강조되는데, 하나는 오른쪽 바닥에 버려진 위대한 학자 에라스무스의 판화, 또 다른 하나는 랜턴 근처의 부엉이에게 안경을 건네는 아이이다. 이 아이의 행위는 네덜란드 속담 "부엉이는 보고 싶어하지 않는데 그것에게 안경이나 빛이 무슨 소용인가?"를 표현한다고 한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면 하나하나, 인물 하나하나 공을 들인 것이 보인다. 천방지축 말괄량이 같기는 해도 내게 아이들은 그저 너무나 귀여운 존재다.




투명한 물방울과 깨알같이 그려 넣은 개미들이 인상적인 이 정물화는 Jan van Huysum(얀 반 하위숨)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Jan van der Heyden(얀 반 데르 헤이던)이 그린 독일 쾰른의 풍경화로, 왼쪽에 보이는 것은 카르투지오 수도원 교회이고 멀리 보이는 것은 성 판탈레온 교회라고 한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Adriaen van de Velde(아드리안 반 데 벨데)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헤이던과 자주 협업한 작가였단다.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화가 William Turner(윌리엄 터너)의 작품도 빠지지 않고 자리하고 있다.




Vincent van Gogh(빈센트 반 고흐)가 생레미 요양원에 있을 시절 그린 올리브 나무 시리즈 중 하나인 <올리브 나무>도 만나볼 수 있다.




Paul Gauguin(폴 고갱)의 주요작 중 하나인 <설교 후의 환영>도 전시되어 있다. 작품의 오른쪽 상단에는 야곱과 천사가 싸우고 있는데, 이는 육체와 정신의 싸움을 의미한다고 한다. 안내문에 따르면 이 작품에서 고갱은 자신의 새로운 '합성주의' 양식을 시도했으며, 이는 대담한 색상과 뚜렷한 윤곽선, 평면적인 원근법을 특징으로 하고, 스테인드 글라스와 일본 목판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훌륭한 작품들이 매우 많으며, 아쉽게도 폐장 시간이 되어서 나가야만 했다. 내일 다시 와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내셔널갤러리를 빠져나온 나는 J. K. Rowling이 소설 해리포터를 쓸 때 자주 방문했다고 알려진 카페 The Elephant house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구글맵이 알려준 대로 당도한 그곳엔 이러한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었고, 근방을 헤맸지만 새롭게 이전했다는 위치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일단은 숙소 체크인부터 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겨울 외투에 배낭까지 얹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니 고단함이 밀려왔지만 거리 어디에나 시선을 두는 곳마다 온통 예쁜 풍경으로 가득하여 자꾸만 피로를 잊을 수밖에 없었다.






숙소까지 향하는 동안 에든버러의 풍경을 만끽하며 도착하여 무사히 체크인을 마쳤다. 가성비 숙소라 걱정했는데 꽤 깔끔했고 룸메이트도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 안도했다. 배정받은 침대 위에는 웰컴 스낵으로 동그란 쇼트브레드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별 거 아닌 작은 과자 한 조각이지만 기분이 좋았다. 쇼트브레드를 좋아하는 나는 보자마자 당장에 먹어 치워 버렸다.




이제 다시 엘리펀트하우스를 찾아서 중심 거리로 나왔다. 배낭을 내려놓으니 몸이 한결 편하다. 비는 여전히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하며 나를 성가시게 하고 있었지만 배낭을 벗어 버린 것만으로도 이 궂은 날씨에 맞설 전투력이 상승한 기분이 들었다.




에든버러는 특별히 대단한 일정 없이도 그냥 걷는 것만으로 즐거운 곳이다. 실제로 보면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웅장하고 신비롭다.






고스트버스 투어라니 너무 궁금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풍요롭진 않으니 그냥 지나가도록 한다.




에든버러에 이런 곳도 있었다니. 다음에 또 에든버러에 온다면 여기도 들러봐야겠다.


National Library of Scotland (스코틀랜드 국립 도서관)



에든버러의 마스코트와도 같은 충견 Bobby의 동상도 거리에 놓여 있다. 이 Bobby의 코를 만지면 행운이 찾아오거나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에 모여 코를 만지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아빠의 도움을 받아 강아지의 코를 쓰다듬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아가야, 행운 잔뜩 받고 행복한 어른으로 자라나길 바랄게!




걷다 보니 해리포터 속 Diagon Alley(다이애건 앨리)에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진 거리 Victoria Street에 왔다. 그렇게 비슷한 것 같지는 않지만... 형형색색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아기자기하긴 하다. 이 거리가 그렇게 길지는 않아서 지나가다 들르는 곳 정도로 기대하는 것이 좋겠다.




웬걸! 바로 이 거리에 이전한 The Elephant House 카페가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입장이 마감되어 내부 착석은 불가하고 테이크아웃 주문만 가능하단다.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으므로 아쉽지만 도로 나왔다.




늦은 시간이 되니 갈 수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없고, 음주나 시끄러운 장소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비교적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하는 서점이 있어 서점투어를 좋아하는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곳을 방문했다. Topping & Company Booksellers라는 이름을 가진 독립서점인데 규모가 꽤 크다.




Blind Book 코너도 있고 책 종류도 매우 다양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특별한 콘셉트가 있는 서점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 서점답게 다른 프랜차이즈 서점들과는 또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으니 서점투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에든버러에 갔을 때 이 서점에 방문해 보기를 추천한다.




서점 구경을 하고 나오니 이제는 정말로 갈 곳이 없었다. 숙소 직원에게 추천받았던 재즈바나 위스키바에는 도무지 흥미가 일지 않았고, 사실 맛있는 커피 한 잔이 절실했을 뿐인데 모두 알다시피 유럽에선 저녁 늦은 시간까지 커피숍을 운영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간신히 찾아낸 곳이 프랜차이즈 커피 매장인 이 Black Sheep Coffee였다. 따뜻한 곳에서 비를 맞지 않고 커피만 마실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일 것이라는 마음으로 들어온 곳인데 막상 이 맛없는 커피를 마시고 나니 만족은 고사하고 문득 고독함이 밀려왔다. 카페에 나 말고는 다른 손님이 아무도 없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음주를 즐기지 않는 1인 여성 여행객은 밖에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다. 아무래도 정처 없이 혼자 밤 산책을 즐기기엔 치안이 다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때마침 만나기로 했던, Makars Mash Bar에서 사귀었던 친구에게 퇴근했다는 연락이 와서 커피잔이 비워지자마자 곧장 커피숍을 나와 그녀를 만나러 갔다.




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녀의 플랏에 초대되어 그녀의 플랏메이트와 함께 영화를 보며 수다를 떨다가 거의 새벽 세시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서로 국적과 나이도 다른 이들이 처음 만나 모인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헤어지는 게 아쉬울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에든버러에서의 시간이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이지만 이곳에서 만난 이들 모두 친화력이 좋고 사교적이며 상냥하여 스코틀랜드인들에 대한 좋은 인식이 머릿속에 강하게 박혔다. 잉글랜드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스코틀랜드. 내일은 또 어떤 시간을 보내고 어떤 추억을 쌓게 될지 몹시 기대된다. 에든버러에 오길 정말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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