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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Oct 20. 2023

감기, 뱅쇼, 그리고 어린이정경

R. Schumann | Kinderszenen, Op.15




지난주부터 유난히 기력이 달리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속이 허하더니 사흘 전 아침엔가, 기상하니 목이 몹시 아팠다. 그래도 컨디션에는 별 문제가 없어서 이때 잘 관리하면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는 오만이었는지 서서히 감기의 증상들이 하나둘 나타나다가 급기야는 제대로 몸살이 나 버렸다. 아무래도 목을 많이 쓰는 직업이라 다른 부위들보다 약해져 있어서 그런지 인후염이 가장 먼저 그리고 심하게 찾아왔다.


직업 특성상 병가를 내기가 거의 불가능한지라 아프다고 어디에 어리광 부릴 처지도 못 되었다. 축축 늘어지는 팔과 다리, 목을 힘겹게 가누며 출근길에 나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곧 기절할 것 같다가도 막상 교실에 아이들이 꽉 들어차고 수업이 시작되면 아프다는 사실도 잊는다는 것이다. 바쁘고 정신없는 나머지 뇌가 아프다는 감각에 상대적으로 신경을 못 쓰기 때문에 인지를 못 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아이들에게서 기를 흡수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그 덕분에 어찌저찌 수업을 그야말로 ‘하얗게 불태운다’. 그렇게 불태우고 나서 퇴근할 때가 되면 그제야 미뤄뒀던 모든 고통이 밀려온다.


치열한 전투를 치른 병사처럼 기다시피 하여 집에 도착한 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누워 스르륵 눈을 감는다. 씻어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은 정말 몸을 못 움직이겠다.

기절한 것인지 쪽잠을 잔 것인지 분간이 안 되지만 어쨌든 잠시간 눈을 붙이고 일어나 가까스로 샤워를 마치고 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프랑스에서 이른바 천연 감기약이라고 불리는 ‘뱅쇼’라는 음료가 있다. 레드와인에 각종 과일들, 정향, 팔각, 시나몬, 후추 등을 넣어 끓여서 마시는 음료인데, 비타민 C가 풍부하고 피로 해소에 도움 되어 감기 예방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감기에 걸렸을 때 회복을 위해서도 마시면 좋다고 한다. 나는 연말이면 집에서 파티를 하고 남은 와인을 처리하기 위해 뱅쇼를 끓이곤 하는데 오늘은 뱅쇼만을 위해 그냥 새 와인 한 병을 개봉하기로 했다. 뱅쇼를 끓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재료들이 필요하여 손이 좀 가는데, 다행히 얼마 전 사둔 뱅쇼 키트가 찬장에 있다. 이 뱅쇼 키트가 없었다면 병자인 지금으로서의 나는 절대 뱅쇼를 끓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에서 기분 좋은 향이 퍼져 나와 집안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도저히 서 있을 힘이 없어서 주방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양말 모양으로 웅크리고 누워 뱅쇼가 끓여지는 소리와 향, 그리고 방 안에 가득 찬 습기를 느껴 보았다. 와인 속에서 끓는 향신료가 내뿜는 향의 확산력이 어찌나 센지 내 몸의 뼈 위를 덮고 있는 살가죽과 근육이 그 수증기에 녹아서 흐물텅거리다가 이내 사라지곤 그 자리에 수증기 구름이 뒤덮인, 구름 인간이 되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완성된 뜨거운 뱅쇼를 컵에 따라 담고 골골거리며 식탁 앞에 앉았다. 포근한 음악이 듣고 싶어서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연주한 슈만의 <어린이 정경> 음반을 틀었다. 의자와 한 몸이 될 기세로 거의 파묻혀 들어가듯 의자 안에 몸을 말아 넣고 뱅쇼가 담긴 따뜻한 컵을 양손에 쥐었다.


슈만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작곡한 열세 곡의 소품들로 이뤄진 낭만적 소품집 <어린이 정경>.

따뜻한 뱅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나의 뱃속을 온기로 채웠다. 마르타아르헤리치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슈만의 음악은 귀를 타고 넘어가 나의 머리와 가슴을 온기로 채워줬다. 이로써 나의 몸 전체가 온기로 가득 찼다. 그 음악을 들으며 스르륵 눈을 감으니 내가 어린아이가 되어 곁에서 엄마가 정성스레 나를 돌봐주고 있는 것 같다. 음악이 마치 엄마가 덮어주는 포근한 이불처럼 내 몸 위에 덮인다. 그리고 곧이어 잘 자라고, 꿈속에선 아프지 말고 행복하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따뜻한 뱅쇼 한 잔에 몸이 스르륵 녹는다.






Martha argerich가 연주하는 R. Schumann의 <Kinderszenen, Op.15> 영상을 첨부한다.♪



"잘 자. 좋은 꿈 꿔. 나의 사랑스러운 아가."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The Cradle> by Berthe Moris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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