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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은 파랑이다. 누군가에겐 노랑이고.

by Daria



소위 현대미술은 무엇을 표현했는가를 탐구하기보다는, 왜 그렇게 표현했는가를 탐구하는 예술이라고도 한다.


현대미술 앞에 놓여있는 순간, 작가는 나(=감상자)에게 시원하게 정답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백지를 펼쳐놓고 여기에 무엇을 쓰든 그것이 곧 당신의, 혹은 우리의 답이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게는 그것이 현대미술의 재미있는 지점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동안, 처음에는 작가가 전하고자 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그 후에는 이 주제에 대한 '나'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결국엔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빌미로 하여 세상의 어떠한 측면에 온전히 몰입하듯 깊이 고민해 보고 덩달아 ‘나’ 자신에 대해 한 발짝 더 가까워지게 된다. 그래서 때때론 현대미술 작품을 보다가 순간적으로 감당하기 힘들 만큼 압도적인 감정의 고조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한 순간이 올 때면 정말 온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로 짜릿하다.


어제는 <론 뮤익 展>을 다녀왔는데, 같은 건물(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MMCA 서울 - 한국 현대미술 하이라이트 展> 또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곤 이틀 연달아 이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하게 됐다. 오늘은 어제보다 날씨가 좋아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에 덕수궁 산책을 즐겼는데,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한껏 즐긴 직후 이 한국현대미술작품들을 감상하니 그 감동이 더욱 배가되는 듯하였다.


완연한 초여름이다.



이전에도 한국 추상미술 전시를 다녀온 뒤 작성하였던 글을 다시 한번 빌려오자면, 한국의 현대미술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모진 환경 속에서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 현재까지 이어져온, 그 나름의 의의와 메시지가 있는 세계이다.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같은 한국인이기에 이들 작품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감동의 깊이가 두텁달까. 나름 자국민의 특권이다. 하하

https://brunch.co.kr/@myhugday/55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작년에 감상했던 한국 추상미술 전시 글(참고))



90여 점의 굉장히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그 모든 작품들에 대해 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특별히 더 인상 깊었던 작품들 몇 가지만 가볍게 감상을 풀어본다.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김환기 작가의 <산울림 19-II-73#307>을 마주할 수 있는데, 원래도 김환기 작품을 좋아하는 나는 시작부터 묵직한 감동의 펀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캔버스 위에 작가가 수많은 고뇌, 소망, 애환, 후회, 사랑 등을 담아 찍어낸 점들이 나의 마음에 황홀하게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듯하였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김환기 작품은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


바로 오른편에는 유영국 작가의 <작품>에서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새파란 빛이 찬란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유영국 역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미술가 중 한 명인지라 앞선 작품에서 미처 감동을 추스리기도 전에 또 한 번 가슴이 벅차는 것을 느꼈다. ‘파랑’은 ‘파랑’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의 작품. 내게는 마치, 세상은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 그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개개인의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응노 작가의 <군상> 또한 나를 오랫동안 캔버스 앞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우르르 쏟아진 쌀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 광경을 보면서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그저 작고 작은 일부일 뿐이구나,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크고 작은 온갖 것들 또한 이 커다란 세상 안에서는 별 거 아닌 존재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내가 어떤 특정 한 사람에게 특별히 시선을 두기도 하는 것처럼, 나 역시 누군가가 특별히 시선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만큼은 특별한 존재, 작지만은 않은 존재일 수 있음을 덩달아 생각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토록 각기 다른 모든 사람들이 모여 제 나름의 리듬을 그리고 있는 것이, 세상이란 건 서로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한데 모여 공존동생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것임을 새삼스레 느꼈다.




곽인식 작가의 <작품> 또한 인상적이다. 작가는 유리가 깨어진 선이 가장 아름다운 상태를 얻기 위해 수많은 유리를 깨뜨렸다고 한다. 부서지고 깨진 상태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역설적이다.




김창열 작가의 <물방울> 역시 오랫동안 그림 앞에 머무르도록 붙잡아두는 힘이 있다. 이 앞에 서면 왠지 위로를 받는 기분이랄까.




곽덕준 작가의 <계량기와 돌> 또한 아까 유영국 작가의 작품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 정의를 내리고 가치를 매기고 이름을 부여하는 등의 행위는 개인의 의식에 따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민정기 작가의 <영화를 보고 만족하는 K 씨>라는 작품은 심오하고 불편하여 대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창 선거철인 요즘, 이러한 작품들은 조금 더 무겁게 다가온다.




황재형 작가의 <황지 330> 역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그림이었다. 공장 작업복으로 보이는 낡은 외투, 그리고 그 양 가슴에 각각 달린 두 종류의 명찰, 해어진 러닝에 달린 '쌍방울' 택. 산업화 속 상실되어 가는 휴머니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강익중 작가의 <삼라만상>은 작품의 메시지도 메시지이지만, 정교하게 박힌 수많은 온갖 만상을 자세히 뜯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김범 작가는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라는 아주 재미난 작품을 만들었다. 발상의 전환, 고정관념 탈피, 함부로 정의 내리는 것에 대한 경계 등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홀로 추측해 본다.




6월이 가까워오고 있는 요즘, 오후 여섯 시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밝고 푸르게 빛나고 있다.

오늘은 여러 가지의 작품들을 보며 유난히 한 가지 생각을 많이 떠올렸다. 모든 것은 그저 그대로 존재할 뿐, 그것에 정의를 내리고 이름을 부여하고 특징을 짓고 가치를 매기는 것은 오로지 개개인의 의식에 따라 이뤄지는 것임을 말이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전혀 똑같지 않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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