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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처럼 무대를 팡팡 터뜨린 서울시향의 연주

by Daria


아직 내 마음속 보석함에 묻혀 바깥 구경을 못 하고 있는(것은 물론이고 이제 슬슬 먼지까지 쌓여가고 있는) 공연들이 여럿 있지만, 그래서 기록하는 공연의 순서가 뒤죽박죽이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 다녀온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공연이 너무 좋아서 이 마음을 빨리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으므로, 장유유서(?) 따위는 무시하고 따끈따끈 새로 들어온 이 신참 보석 먼저 내어 보이겠다.


오늘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David Robertson(데이비드 로버트슨)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피아니스트 Kirill Gerstein(키릴 게르스타인)의 연주회가 있었다. 연주 곡은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2번과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번, 그리고 존 애덤스의 '원자 폭탄 박사' 교향곡이었는데, 마지막 순서의 원자 폭탄 박사 교향곡이 생소하기도 하거니와 곡명도 특이하고 흥미로워 더욱 관심이 갔다. 어떤 곡을 난생처음 들었는데 그 곡이 좋았을 때의 느낌은 매우 짜릿하고 강렬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느낄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원자 폭탄 박사 교향곡에 대한 예습 따위는 일절 하지 않고 갔다. 그래서 결과는 어찌 되었냐고? 너무 짜릿해서 한바탕 흥분에 젖어 있었더니 공연이 끝난 후 진이 다 빠졌다.


우선, 공연의 1부에서는 피아니스트 Kirill Gerstein(키릴 게르스타인)의 협연으로 Brahms, Piano Concerto No.2 in B-flat major, Op.83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2번)이 연주되었다. 나의 최애 작곡가를 꼽으라면 후보에서 절대 빠지지 않을 인물 중 한 명인 브람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브람스는 완벽주의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세상에 내놓은 곡들을 보면 그가 완벽주의자라는 사실에 대하여 단번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은 단 두 곡뿐인데, 심지어 두 곡의 작곡 시기 사이 간격도 매우 큰 편이다. 그의 젊은 시기에 작곡되었던 첫 번째 피아노협주곡은 개인적으로 내가 매우 좋아하는 곡들 중 하나이기도 한데, 고뇌와 불안이 느껴지는 격정적이고도 역동적인 곡이다. 반면, 두 번째 피아노협주곡은 '비교적' 더 섬세하고 안정적이며 전반적으로 아름답고 서정적이라는 느낌이 지배적이다. 다른 사람들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러하다. 하지만 곡 자체가 서정적이고 섬세하다는 것은 곧 섬세한 해석과 연주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이기도 할진대, 오늘자 오케스트라 연주는 정말 좋았으나 피아노 연주자와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다는 느낌은 그다지 전해지지 않았다. 가장 인상 깊고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역시 3악장의 첼로 독주 구간이었으며, 이때는 나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까지 했다. 아쉽게도 피아노 독주 구간에서는 크게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구간이 없었다.


그 후, 대망의 2부의 시작은 Sibelius, Symphony No. 7 in C major, Op. 105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으로 화려하게 열렸다. 곡이 시작되자마자 머릿속에 저절로 아득하리만치 드넓고 새하얀 설원이 펼쳐지고, 저 멀리 지평선 위에는 오묘한 주황색 석양이 수평하게 쌓이며, 북유럽의 아름다운 겨울 풍경이 황홀하게 나타났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던 시벨리우스 연주는 곧이어 이번에는 나를 눈이 두텁게 쌓인 숲 속으로 데려갔고, 그곳엔 날카롭게 빛나는 노란 햇살과 이따금씩 울렁이듯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나뭇가지 위의 눈을 땅 위로 와르르 떨어트리며 자연의 고요함, 시간의 순환을 차근차근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보여 주었다. 이 연주를 감상하는데 동원된 감각은 청각뿐인데, 상상 속에서 소리가 이미지화되며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다채롭고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이번 곡에서 대단히 인상 깊었던 점으로 금관 독주자의 뛰어난 실력을 이야기하고 싶다. 특별한 기대 없이 들었다가 너무나 안정적인 연주에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John Adams, Doctor Atomic Symphony (존 아담스 '원자 폭탄 박사' 교향곡)는 한국 초연이었고, 앞서 이야기했듯 이 공연장에서 난생처음 듣게 되었는데, 정말 재미있고 짜릿하니 그야말로 듣는 내내 도파민이 팡팡 터지는 곡이었다. 아무래도 처음 듣는 곡이다 보니 소리 하나하나 새롭고 흥미롭기도 하였는데, 일반적인 클래식 음악보다 다양한 종류의 악기가 편성되어 있는 곡이어서 그 새로움과 재미가 훨씬 배가되었다. 그의 오페라 <Doctor Atomic>의 음악을 재구성하여 만든 교향곡이라고 하던데, 그 오페라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 교향곡만으로도 오페라 한 편을 다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약 30분 동안 기승전결 잘 짜인 오페라 한 편이 뚝딱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랄까. 노래도, 연기도 없이 말이다. 오펜하이머 박사의 트리니티 프로젝트를 소재로 하여 만든 오페라라고 하던데 나중에 DVD 등을 통해 이 오페라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향곡이 좋으니 원판인 오페라에도 당연히 관심이 가는구나.


불과 이틀 전에도 예술의전당에서 KBS 교향악단의 연주에 감탄하였는데, 동일한 장소에서 이번에는 또 서울시향의 연주에 감탄을 하였으니 이번 주는 아주 호연 대잔치이다. 사실 이렇게 연달아 연주회에 참석하는 것은 큰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일이라 웬만하면 주 1회 정도로 빈도를 지키는 편인데, 힘들 거라 각오하고 이행한 일이지만 소모한 에너지보다 훨씬 크고 값진 감동을 돌려받은 것 같아서 아주 보람차고 뿌듯하기 그지없다. 서울시향의 호연에 깊이 몰입한 뒤 기력이 쇠하여 저녁에 계획해 놓은 일들을 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이렇게 곧장 글도 쓸 정도로 인상 깊은 기억을 얻었으니 어찌 되었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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