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날 화이트큐브 갤러리의 Julie Curtiss(줄리 커티스) 개인전을 방문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화이트큐브에 방문할 때마다 늘 비가 왔었으니 이것 참 기묘한 우연의 일치이다. 웃긴 건 런던에 있는 화이트큐브를 방문했을 때도 비가 왔었다는 사실.
'깃털로 만든 여인'이라는 부제를 단 전시답게 새, 그중에서도 특히 펠리컨을 모티프로 한 작품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여인'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가면 으레 예상되는 작품 성격이 있는데, 이 전시에서도 역시 예상은 적중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전시는 기대한 것보다 훨씬 좋았고, 훨씬 감각적이었으며, 나는 그녀의 매 그림마다 그 앞에서 깊고 칠흑과 같은 생각의 심연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그림들은 강한 상징성을 띄고 있으며, 상징을 이루는 그 '매개체'를 통해 작가에게 공감하는 순간, 강렬하게 쏟아지는 감정의 폭포 및 전이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여태껏 화이트큐브 서울에서 관람한 전시들 중에 이 줄리커티스 전시가 가장 좋았다.
봄맞이 대청소는 가사노동 행위이면서도 가정 내 의미 있는 연례행사이기도 하다. 작가가 Spring Cleaning이라 이름 붙인 이 작품을 보면서,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들고 막 집을 나서려는 깃털로 뒤덮인 여인을 보며, 그리고 그녀의 발에 신겨져 있는 날렵하게 잘 빠진 스틸레토힐을 보며, 엄마이자 아내인 그녀도 여인임을, 그녀의 희생과 고독을 헤아려 보게 된다.
하나의 캔버스 안에 공간이 분리된 듯한 연출을 만들어낸 아래 두 작품 역시 굉장히 상징적이고도 감각적이다. 작가가 영화 미술 쪽 일을 했었어도 두각을 드러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엄마로서의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이자 이 전시의 모티프로 대표되는 '펠리컨'이라는 새는, 다양한 분야에서 모성, 자기희생, 부활, 변형, 양육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펠리컨의 상징성을 알고 나면 작가가 펠리컨을 비롯한 새들을 활용해 작품을 창작한 동기와 의미에 대하여 한결 더 잘 이해하게 된다. 특히, Nocturnal Visitor라는 제목을 단 아래 그림은,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주양육자로서의 시간을 보낸 후 고요한 한밤중이 되어서야 비로소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본연의 나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한 여성을 보는 것 같아 무척 감명 깊게 다가왔다. 더욱이, 푸른 어둠 속에서 호박색으로 밝게 빛나는 맑고 또렷한 눈망울은, 엄마이기 전에 그녀가 얼마나 꿈 많고 총명한 사람이었는지 보여줌과 동시에 현재 그녀의 숭고한 희생을 더욱 도드라지도록 해 주는 것 같았다.
이외에도 꽤 여러 점의 작품들이 전시장 안을 채우고 있었고, 모든 그림 및 조각들의 주제는 '엄마가 된 여인'이라는 하나의 동기로 귀결되는 듯하였다. 나 역시 언젠가 엄마가 될지도 모르는, 그러나 현재는 그저 나 자신을 위해, 나 자신에 의해 살아가는 꿈 많은 한 여성이기에, 그녀의 작품들은 무척 울림 있게 다가왔다.
며칠 전, 임신한 한 친구와 함께 브런치 식사를 하였다.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내가 이토록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좋아하는 것도 많고 호기심이 강한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우리 엄마가 내게 최대한 많은 경험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였고, 그 뒤에는 엄마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빛바랜 열망 및 꿈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됐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두고 "쟤는 고집이 세서 그냥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둬야 해."라고 말하셨지만 어쩌면 엄마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를 통해 엄마가 원하던 삶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희생과 노고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날갯짓을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줄리 커티스 전시 감상기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