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매년 겨울이 되면 행하는 연말 루틴 행위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로서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관람을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매해마다 똑같은 발레단에 똑같은 내용, 누군가는 내게 질리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으나 아니! 절대 질릴 수가 없다. 매년 볼 때마다 아름답고, 설레고, 행복하고, 포근하며, 황홀하다. 특히, 무용수들이 매년 미묘하게 다른 애드리브를 보여주기도 하고, 무대 디자인이나 연출에서 역시 미묘한 차이를 볼 수 있어 그러한 부분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더욱이, 이번 2025년에는 친한 친구와 함께 관람하여 더욱 특별한 <호두까기인형>이었다.
금번 <호두까기인형>도 예년처럼 왕자 역에 김기완 발레리노 캐스팅 회차로 관람하였고, 마리 역에는 한나래 발레리나가 함께 호흡을 맞추었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도 2025년에 관람한 발레 공연들 거의 모두가 주연으로든 조연으로든 한나래 발레리나가 캐스팅된 회차였다. 마치 한 해를 그녀와 함께 보내기라도 한 것 같은 정겨운 느낌이 든다.
기완왕자는 올해에도 노련하게 호두왕자의 역할을 소화해 냈고, 모든 장면과 춤을 매끄럽게 소화해 내어 마치 장애물 하나 없는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 같았다. 다만, 몇 가지 동작에서는 예전보다 다소 무거운 느낌이 드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흠잡을 데 없는 호두왕자였다.
나래마리 또한 어른 마리 역할을 찰떡같이 소화했고, 특히 그녀의 길쭉하고 가느다란 체형은 흰색의 하늘하늘한 마리 의상과 사랑스러운 마리 캐릭터에 무척 잘 어울렸다.
더불어, 작년에도 그랬듯 올해에도 역시 어린 마리 역을 맡은 어린이 발레리나의 연기와 춤이 매우 훌륭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올해 어린 마리 역을 맡은 무용수는 김유주 발레리나라고 하던데, 이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나 수년 뒤 얼마나 훌륭한 발레리나가 될지 정말 기대된다.
한편 올해 <호두까기인형>은 내게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는데, 1부 앞부분의 크리스마스 파티 장면에서 나는 웬일인지 작고 오묘한 슬픔을 느꼈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이 장면에서 슬픔 따위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비록 그 슬픔은 크지 않았고,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지만, 풍요와 행복이 가득한 장면에서 그러한 이질적인 감정을 느낀 것은 꽤 당혹스럽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한 경험이었다. 또한, 마리가 호두왕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요정 및 인형들과 함께 보낸 행복한 순간은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그저 하룻밤의 꿈에 지나지 않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비현실의 세계, 다시 만날 수 없는 존재들이 된다는 사실도 아주 조금 슬프게 다가왔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들, 한때 사랑했던 것들,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이번 <호두까기인형>은 내게 있어 마냥 행복하고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은 공연으로 가슴속에 남았다. 다음 해의 <호두까기인형>은 내게 어떤 작품으로 남게 될까. 어떤 2026년을 보낼 것이며, 그 한 해의 끝에 관람한 나의 또다른 <호두까기인형>이 어떠한 공연으로 가슴에 새겨질 것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