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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Nov 06. 2023

내게 영감을 주는 두 존재, 가을과 브람스교향곡1번

J. Brahms | Symphony No. 1  op. 68



가만히 생각해 보니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의 다른 곡들에 비하여 평소에 들어본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 곡이 별로여서는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지극히 개인적인 내 취향으로) 엄청나게 좋은 것도 아니지만, 그저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클래식음악 장르를 들을 때만큼은 음악앱보다는 CD(음반)를 통해 듣는 것을 선호하는데 가만 보니 내게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이 수록된 음반은 없더라. 소장 음반이 없으니 이 곡이 집 안에 울려 퍼질 기회는 더욱 없었을 것이다. 여태껏 구입할 생각도 안 했던 것을 보면 이 곡에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째서인가… 들어보면 좋은 곡임은 분명한데 말이지.

음악이란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수많은 음악들 중에 나와 유난히 주파수가 잘 들어맞는 음악이 따로 있다고나 할까. 물론 각자 개개인마다 그 주파수란 것이 잘 맞는 음악들은 다 다를 것이다. 그러한 관점으로 생각해 보자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나와 주파수가 별로 잘 맞지는 않는 곡인가 보다.


반면,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은 내가 참 좋아하는 곡인데 특히나 불안하고 자신이 없을 때, 나 스스로에게 확신을 북돋워주고 싶을 때, 혹은 이따금씩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을 때 들으면 나 자신에게 긍정적인 영감을 채워줄 수 있다. 이 교향곡 1번을 좋아하는 것만 봐도 나에게 브람스의 음악은 대체로 이처럼 고무적이고 웅숭깊으며 영감을 주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겠다.




올해는 정말 많은 해외 유수한 오케스트라들이 한국을 찾아오고 있는데 런던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교향곡 1번을 들고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Christian Tetzlaff)와 함께 10월, 한국을 방문했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뿐만 아니라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의 실연을 듣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이번 공연으로 인해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에 대한 나의 인상에 극적인 변화가 생기기를 기대해 보며 예매를 했고 공연장을 찾았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번 공연도 이 바이올린협주곡에 대한 나의 인상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음악에 심취한 채 매우 열정적으로 연주하여 그의 외양도 그렇고 흡사 데이비드가렛을 연상시키기도 했는데, 이 오케스트라 및 지휘자의 연주 성향과는 서로 다른 결을 지닌 듯했다. 이들 모두가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느낌이 들지는 않아서 1부 연주에 그다지 집중하지 못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곡도 아닌데 집중마저 잘 되지 않으니 재미가 없었다. 오히려 협연이 끝난 후 이어진 바이올리니스트의 독주 앙코르가 더 인상적이었다.




1부 연주가 끝나고 몸을 환기할 겸 건물 외부를 가볍게 산책했다.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남아 2층 로비에서 메인로비를 내려다보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보통 가볍게 산책 한 번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면 인터미션을 알차게 채울 수 있는데 이 날은 유난히 평소보다 인터미션이 길게 느껴졌다. 평소대로 했는데 왜 시간이 남아있는 것인지 의문을 뒤로한 채 가만히 로비를 구경했다. 로비에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다 짝을 이루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고독감이 밀려왔다. 평소에도 대개 혼자 공연장을 다니므로 이런 고독감은 여간해선 느끼지 않는데 이 날은 왜인지 무료했고 사람들은 일행과 함께 즐거워 보였으며 그 속에서 나는 혼자 더디게 흘러가는 듯한 시곗바늘만 쳐다보고 있었으니 불현듯 고독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덮쳤다.


그렇게 파도처럼 밀려온 고독감을 도망치듯 벗어나 뭍으로 올라와 착석한 나는 가만히 앉아 교향곡 1번이 연주되기를, 이 곡이 그러한 파도들을 다 거두어가고 영감의 생명들을 모래 위에 올려두기를 기다렸다.




이 날 느낀 런던필하모닉의 연주는 우리가 흔히 영국에 대해 스테레오타입처럼 으레 떠올리곤 하는 ‘신사’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이 깔끔한, 지극히 신사적인 연주였다. 브람스 교향곡 1번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들만의 개성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모양이 좋았다. 간혹 유명한 곡들은 그 곡의 명성에 크게 부담을 느낀 탓인지 우왕좌왕하다가 제 톤을 잃어버린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게 될 때가 종종 있곤 한데 런던필하모닉의 연주는 일정한 톤을 유지하는 점이 좋았다. 비록 그것이 다채로운 즐거움을 준다거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형태가 아니라 해도 악단의 색깔을 차분하게 음미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회는 또 다른 재미를 제공한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공연장 바깥으로 나오니 날씨가 매우 쾌청하고 산뜻하기 그지없다. 런던필하모닉의 산뜻한 연주와 같은 날씨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인 가을, 오늘에게서 가을밤의 진한 정수가 느껴지는구나.


내게 항상 영감을 주는 두 존재, 가을브람스 교향곡 1번이 만나 내가 막연하게 그리고 있던 흐릿한 생각에 선명한 선과 색을 부여했다. 그래서 나는 떠날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불가피한 생의 정지를 맞이해야 할 텐데 그 순간이 오기도 전에 스스로 나를 정지시키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가끔은 길을 잘못 들어 도로 뒤로 가기도 하고 때론 잠깐 멈춰서 쉬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다시 일어나 부지런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Paavo Järvi가 지휘하는 Orchestre de Paris의 Johaness Brahms Symphony No. 1 C minor op. 68 연주 영상을 첨부한다.♪






크리스티안 테츨라프(Christian Tetzlaff) • 바이올리니스트 • 1966 독일


에드워드 가드너(Edward Gardner) • 런던필하모닉 수석지휘자 및 베르겐필하모닉 상임지휘자 • 1974 영국


런던 필하모닉(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LPO) • 관현악단 • 1932 영국




<Snow Storm: Steam-Boat off a Harbour's Mouth> by William Turner(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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