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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Dec 26. 2023

[4] 런던의 '꺾이지 않는 마음'을 마주하다.

런던여행기



버킹엄궁전길(Buckingham Palace Road)이라고도 불리는 거리 위를 거닐며 커피숍들이 모여있는 곳을 향했다. 정오의 햇살은 내 머리에 털모자를 씌워주기라도 하는 듯 부드럽고 따뜻하게 내려앉았고, 적당히 차가운 공기가 햇살의 이러한 따뜻함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거리의 상점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실내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어디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마치 크리스마스의 요정이 반겨줄 것만 같은 사랑스러운 느낌을 내뿜었다. 이러한 사랑스러운 상점들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으로 갈팡질팡하던 나는 그의 구글맵 리뷰창이 호평 일색이던 한 커피숍을 택해 들어갔다. 테라스에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는 것을 보며 겨울이 아닌 계절에 왔다면 더 매력적인 공간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풍스러운 외양을 한 건물의 입구에 놓인 귀여운 크리스마스 리스 장식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외관을 보며 가게 내부도 똑같이 고풍스럽고 멋질 거라 예상한 바와 달리 안타깝게도 인테리어는 그다지 조화롭지 않았고 구조 또한 어딘가 난잡해 보였다. 그래도 아늑하고 조용해 보이는 분위기가 나름 맘에 들었다. 나는 따뜻한 플랫화이트 한 잔을 주문하고, 당최 무슨 콘셉트로 한데 모아 놓은 건지 모르겠는 각각의 테이블들 중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썩 맘에 드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가게 안에 남아있는 자리들 중에선 그나마 제일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어서 다음 행선지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가야 했으므로 맛있는 커피를 후딱 마실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들어온 곳을 바로 되돌아 나가기엔 조금 귀찮기도 했고….


엉덩이가 푹푹 꺼지는 가죽 소파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니 노곤노곤 몸이 풀리기 시작하여 이대로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잠시 졸든지 책을 읽든지 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난 런던에 쉬러 온 건데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것은 모두 장거리 비행을 마치고 곧바로 관광길로 튀어나와 피로에 젖은 나약한 육신이 뇌에 속삭이는 불온한 감언이설이라고 판단되었고,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단단히 붙잡고자 괜히 허리를 곧추세웠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커피숍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호시탐탐 아무에게라도 말을 걸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누군가에게 대화를 시도하기엔 테이블 간의 간격이 너무 넓었다.(이 커피숍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만, 아무나 붙잡고 떠들고 싶은 당시의 나에겐 쓸모없는 장점이었다.) 나의 건너편에 앉은 한 잘생긴 남자에게 말을 걸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우리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었다. 게다가 그는 아주 집중하여 책을 읽고 있었으므로 그를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앞으로 누구라도 만날 기회는 많겠거니, 마음을 비우고 버킹엄 궁전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며 휴식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찾아온 거리.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과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하게 느껴진다.



내가 방문한 커피숍에서의 사진들.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방문하기 위해 몸을 이끌고 다시 겨울의 런던 거리 위로 나왔다. 버킹엄 궁전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서로 매우 가까우며, 이동하는 길에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타워, 일명 ‘빅벤’을 볼 수 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전쟁 중에도 무너지지 않으며 한결같이 영국인들에게 시간을 알려 온 이 거대한 시계탑이 런던 시민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닌 상징물일지 생각하니 외국인인 나 조차도 괜스레 조금 숙연해졌다. 그저 인스타그래머블한 멋있는 랜드마크가 아니라 런더너들의 심장처럼 중요한 곳이라고 여겨졌고, 시민들의 가슴속에 새겨진 그 빅벤의 역사를 내 나름대로 존중하는 마음과 함께, 그 듬직한 모습을 카메라 안에 담아 보았다.


그리 생각하기 무섭게 그 아래에서 서로 나이 차이가 아주 많이 나 보이는 두 남성이 울타리에 걸터앉아 키스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내게는 다소 놀랄 만한 광경이었지만 거리 위의 런더너들은 이 모습에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이 그저 제 갈길을 가기에 바빴다. 그 커플은 한바탕 키스를 마친 후 서로의 손을 잡고 매우 행복해하며 거리를 걸어갔다. 그러는 모든 과정 동안 충격받은 표정을 지어 보인 사람은 이 드넓은 거리에서 오직 나뿐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여기는 가치관에서 벗어난, 다른 가치관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런더너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이 깊어졌다.



내가 찍은 빅벤의 사진들.



*빅 벤(Big Ben)

: 영국 런던의 랜드마크이자 영국 국회의사당의 상징이기도 한 대형 시계탑 속의 종(鐘) 이름이다. 이 시계탑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타워(Elizabeth Tower)이지만 빅 벤이라는 종의 이름이 전체 시계탑의 이름처럼 불리고 있는 실상이다. 빅벤이라는 이름은 건설 당시 책임을 담당했던 벤저민 홀 경(Sir Benjamin Hall)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벤저민 홀 경은 빅벤처럼 큰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타워는 1859년 5월 31일에 완공되었으며, 타워의 높이는 96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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