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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Jan 06. 2024

구본창의 항해. 항해는 계속된다.



눈이 펑펑 내리고 추위가 매섭던 날, 구본창 사진작가의 대규모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 : Koo Bohnchang’s Voyages>에 다녀왔다.


구본창의 작품 세계의 흐름을 깊이 탐구할 수 있도록 전시를 총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 놓았는데, 해당 주제에 대해 제시된 순서대로 따라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감상이 될 것 같다. (관람 인파가 너무 몰리면 전시장 안내원들이 전시에 따라 역순 감상을 안내하는 경우가 때때로 있어서 이야기한다.)


<모험의 여정>에서는 그의 타고난 것 같은 미적 감각을 보며 감탄했는데, 학습을 통해 습득한 전문 지식이나 기술도 그의 멋진 사진 작품의 결과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사진작가의 본래 미적 감각과 창의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 스스로가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인지한다 해도 자신이 그간 걸어온 길 -심지어 탄탄대로와도 같은 길- 을 떠나 새로운 미지의 길에 발걸음을 들이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용기가 웬만큼 크지 않고서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더더욱 그의 모험의 여정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는 당시에 한창, 홀로 외국으로 떠나서 잠시 살다 오고 싶다는 생각으로 고민에 빠져있었으므로 그의 모험 여정을 따라가는 동안 마음이 심란했다. 이제 마냥 어린 나이도 아닌데, 이 사람의 선택에 견줄만한 확신도 없으면서 무조건 떠나겠다고 하는 나의 생각은 그저 치기 수준이 아닐까.


그의 감각이 돋보이는 모험의 여정을 지나 <하나의 세계>로 들어오니 그의 창의력에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며 “이런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구나”, “이런 시선으로도 대상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구나” 등의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하나의 세계>에는 실험적인 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매우 다른 분위기의 관조적인 작품들도 있었는데, 전시장 내의 설명에 따르면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돌아가신 후 그의 작품 세계는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 작품들을 보며 나 역시 내면을 향한 깊은 관조의 시간을 가졌다.


전환점을 맞이한 후 그의 작품은 여러 과정을 거쳐 한국의 전통문화, 한층 더 본질적이고 함축적인 것에 초점을 두게 되는데, 바로 <영혼의 사원>에서 탈, 도자기, 황금유물, 지화 등을 그만의 방식대로 표현한 사진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이 전시에서 유난히 더 인상 깊었던 특정 섹션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에 대해 대답하기 매우 어려울 만큼 각각의 주제마다 내게 모두 다른 울림과 영감을 주었다. 생각한 것보다 전시 규모가 더욱 방대하여 이 항해를 끝까지 함께 하기에 체력적으로 제법 힘든 일이었지만 고갈된 체력의 무게만큼 양질의 영혼이 몸 안에 채워졌다.


미술관에 들어갈 때도 눈이 펑펑 내렸는데, 나올 때도 역시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마치 어느 한 해의 겨울에 나섰던 항해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다른 한 해의 겨울이 되어버린 마을을 마주한 익명자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돌고 돌아 또다시 같은 자리에 섰지만 그 자리에 선 사람은 예전과 결코 같지 않다.

(*구본창 작가의 작품 시리즈 중 <익명자>가 있다. '익명자'는 '익명의, 미지의, 미행의'의 명사형이라고 한다.)


조금 더 에너지를 비축하여 또 한 번 ‘구본창의 항해’호 보트에 승선하러 가볼까나.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모두 눈이 펑펑 내리던 그 날.


세 작품 모두 구본창 사진작가의 작품.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 중)



*해당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24년 3월 10일까지 진행됩니다.







비단 전시 제목 때문만은 아니고 '나', '본질'을 찾아가는 이 전시의 흐름 속에서 슈베르트의 방랑자환상곡이 생각났다.

Evgeny Kissin 이 연주하는 Schubert의  <Wander Fantasy in C major, D 760> 유튜브 영상 링크를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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