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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Jan 21. 2024

[7] 잊지 못할 그곳, 내셔널 갤러리

런던여행기_내셔널갤러리



그토록 손꼽아 기대했던 ‘내셔널 갤러리’에 들어오다니 무척 설렜다. 피로에 절여진 나의 몸 상태는 좀비나 다름없었지만 이 멋진 예술품들의 아름다움을 각성제 삼아 잠시나마 각성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폐장 시간까지는 약 세 시간 정도 남았으니 부지런히 감상 여정길을 걸어야 했다. (물론 나중에서야 세 시간 안에 이 갤러리를 모두 도는 것은 터무니없이 불가능한 아이디어였음을 깨닫게 됐지만…)


전시장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윌리엄 터너의 작품이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고 뒤이어 멋진 궁륭이 눈길을 거두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들어 매는 공간 안에 놓이게 되었다. <눈보라 속의 증기선>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예상치 못한 터너의 그림을 맞닥뜨리게 된 것만으로도 퍽 반가운데 그곳의 건축 인테리어 또한 화려하고 멋지니 그 한가운데에 선 나는 한층 더 흥분으로 들떴다. 전시실 내부의 붉은 벽을 타고 선 검은 대리석 기둥들은 브론즈 흉상 및 도금 장식과 조각들로 번쩍번쩍 빛나는 궁륭을 받치고 있었다. 물론 그 아래에 훌륭한 회화 작품들이 붉은 벽을 찬란히 수놓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뿐만 아니라 정면으로 보이는 저 멀리에는 조지 스텁스의 거대한 말 그림 <휘슬재킷>이 걸려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눈을 두어도 화려하고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는 이 공간 안에서 내 사진 한 장쯤은 꼭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때마침 내 옆에 앉아 쉬고 있던 관람객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하였다. 그녀에게 내가 원하는 사진 촬영의 구도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고 고맙게도 그녀는 만족스러운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녀는 그 구도가 맘에 들었는지 이후 그녀의 일행과 함께 나와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멋진 궁륭과 미술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


이어 카미유 피사로, 폴 세잔, 클로드 모네, 존 컨스터블, 귀스타브 쿠르베 등 반가운 화가들의 그림을 거쳐, 뜻하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마주한 짝사랑 상대처럼, 반 고흐의 그림 몇 점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곳에는 고흐의 <반 고흐의 의자>,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길>을 비롯하여 <해바라기>가 있었는데, 나는 오래전부터 집안에 고흐의 해바라기 복제화를 걸어두고 있을 정도로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매우 좋아하기에 원화로 마주한 그 작품이 내게 충격적일 만큼 큰 감동을 주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생명을 불어넣고자 했던 순간의 그의 감정이 그 붓질의 흔적을 통해, 덧발라진 물감의 굴곡과 빛깔을 통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좋아하는 작품의 원본을 실제로 마주한 것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화가의 감정이 솔직하게 묻어난, 마치 글자 대신 그림으로 써 내려간 그의 일기와도 같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을 마주한 그 순간의 감동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


고흐와의 만남으로 인한 떨림이 채 가시지 않은 때에 조르주 쇠라의 <Bathers at Asnières>가 커다란 모습으로 나타났다. 조르주 쇠라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화가인데, 내가 어린 시절 난생처음으로 모작을 해 본 그림이 그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모작한 작품은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로, 그 작품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소장하고 있어 이 날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화가의 작품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설레고 즐거운 일이었다.


가슴이 설렘의 여파로 한껏 일렁이고 있을 때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작품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또 한 번 가슴을 쿵 두드렸다. 지금은 예전만 못 하지만 한 때 르누아르의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마치 열렬히 사랑했던 옛사랑을 만난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 보아도 참 사랑스러운 그의 그림은 보는 나의 마음을 달콤한 꿈결에 젖어들듯 부드럽고 예쁘게 만들어준다. 이러한 그의 그림들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조르주 쇠라(좌)와 오귀스트 르누아르(중/우)의 작품들.


봄바람에 실려온 봄내음에 정신 못 차리고 나풀나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왈츠 스텝을 밟는 봄 소녀와 같은 마음으로 작품들을 감상하다가 이내 앙리 루소의 작품 두 점을 마주하였다. 그의 그림을 마주하니 철없는 소녀에서 치열하게 분투하는 사회인으로 마음가짐이 급격히 전환되었다. 전문 교육의 도움 없이도 그만의 독창적이고도 매력적인 화풍을 캔버스 위에 실현해 낸 앙리 루소처럼, 나 자신을 믿으며 내가 가는 길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 보았다.

앙리 루소의 작품들.




긍정적인 자극을 한가득 받고 이어 카라바조, 귀도 레니, 루카 조르다노, 카라치 등의 그림이 있는 17세기 회화 전시실에 들어왔다. 귀도 레니의 <수잔나와 노인들>을 들여다보고 있던 내 모습이 흥미로웠는지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와 불쑥 말을 걸었다.


(남자) “그거 알아요? 이 아래의 그림과 위의 그림의 화가가 다르지만 같은 주제를 두고 그렸다는 사실을요.”


(나) “어머! 그렇네요. 흥미롭군요.”  


그곳에는 <수잔나와 노인들>이라는 주제를 두고 그린 루도비코 카라치와 귀도 레니의 그림이 위아래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는 이 주제가 성경에 등장하는 내용이며, 이 전시실에는 성경 말씀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매우 많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근처의 다른 작품으로 나를 데려가 루카 조르다노의 <피네아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돌로 만드는 페르세우스>를 보여주었다.


(나) “어! 저 이 장면 알아요. 메두사와 페르세우스잖아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읽었어요.”


(남자) “맞아요. 이 시기에 화가들은 성경이나 신화 속 내용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어요. 교화의 목적으로 그린 그림들이 많았고요. 그림의 내용을 통해 그들이 교회나 왕실로부터 그림 의뢰를 받았을 거라고 추측해 볼 수 있죠.”


명찰이나 마이크도 보이지 않고 깃을 세운 코트에 딱딱한 구두까지 신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도슨트는 아닌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미술 작품에 대해서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내심 궁금했지만 초면에 신상에 대해 묻는 것이 혹여 실례가 될까 싶어 끝내 묻지는 않았다.


(남자) “여행 중인가요? 어디서 왔어요?”


(나) “어디서 왔을 것 같아요? 맞혀 보세요.”


(남자) “한국사람인 것 같군요.”


(나) “헉! 어떻게 아셨죠?”


(남자) “한국사람 같아 보여요. 저도 몇 년 전에 한국에 가본 적 있는데 정말 좋았어요.”



(나) “당신은 어디에서 왔어요?”


(남자) “저요? 저는 런던 사람인데요.” (그는 이 질문에 약간 자존심 상한 듯 보였다. '누가 봐도 난 런던 토박이 아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나) “아. 혹시나 당신도 나처럼 여행 중인가 해서 물어봤을 뿐이에요. 와! 한국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는 분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니 반갑네요."


간단한 이야기를 조금 더 주고받은 뒤 그는 내게 대영박물관과 테이트 브리튼에도 꼭 방문하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곤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종교 및 신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들.



정말이지 런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들 친절하고 젠틀하며 쾌활하다. 참으로 매력적인 도시다.







트라팔가 광장 분수와 내셔널 갤러리의 외부 전경.

*안내 책자나 도슨트 없이 나홀로 1층 로비 중앙에 놓인 전시실부터 시작하여 미술 작품을 감상하였다. 감상하다가 보니 깨닫게 된 것인데 각각의 전시실마다 번호가 붙어 있었고, 아마 시대의 흐름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부여한 것 같았다. 나는 그런줄도 모르고 회화 역사의 중간 지점(아마도 로코코)부터 시작하여 뒤죽박죽의 순서로 감상한 것이었다.

(미술사의 흐름 순서대로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면 꼭 안내도를 확인하여 1번 전시실부터 찾아가 번호순으로 감상을 시작하면 된다.)

영국 내셔널갤러리의 여러 작품들.



*내셔널 갤러리 이야기는 다음 화에 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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