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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Feb 04. 2024

[8] 첫인상이 좋았어요. 내일 또 만나요.

런던여행기_내셔널갤러리&채링크로스로드


https://brunch.co.kr/@myhugday/38

(지난 화에 이어지는 이야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또 다른 작품과의 놀라운 만남이 도무지 끝을 모르도록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셔널 갤러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고 다양한 연대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어서 하루를 통째로 이곳에서 보내도 되겠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직접 와서 보기 전까지는 이 미술관의 실제 규모에 대해 몰랐고, 수일간의 여행 일정 중 겨우 세 시간의 저녁시간을 이곳에 할애해 두었을 뿐이니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새로운 방에 들어설 때마다 부족한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점점 더 커져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 엘 그레코, 반 다이크, 루벤스, 프란스 할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등(당장에 기억나는 이름만을 나열했을 뿐 이외에도 매우 많은 화가들의 작품이 있다) 회화역사에 저마다의 한 획을 그은 화가들의 화풍과 필치를 생생하게 느끼고, 또한 당대의 화가들이 어떠한 이상과 포부 혹은 관념을 지닌 채 붓을 휘둘렀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해 보며, 도판이 아닌 실제 작품 앞에서 화가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취해보았다. 그러나 간절히 애석했던 시간은 야속하게도 내 곁에 오래 있어주지 않았고, 이제 그만 취기에서 깨어나라는 듯 어느덧 폐장을 알리는 소등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절반 밖에 감상하지 못한 것 같은데 벌써 이곳을 나가야 한다니. 나는 결국 여일의 일정을 수정하여 런던을 떠나기 전에 내셔널 갤러리를 다시 오기로 마음먹고 나서야 겨우 나 자신을 달래어 미술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짧디 짧은 이번 런던 여행 동안 가장 좋았던 장소 몇 군데를 꼽으라면 주저 않고 ‘내셔널 갤러리’를 포함시킬 만큼 이곳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가장 먼저, 내셔널 갤러리 정문 앞 트라팔가 광장의 존재를 통해 비록 외국인의 입장에서일지라도 영국 역사에서의 중요한 일부를 생각해 보고 런던이라는 도시의 의의를 되새겨볼 수 있었다. 나는 어떤 나라를 여행하는 동안만큼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가능한 한 최대한의 애정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의 런던 첫날을 이곳에서의 시간을 포함하여, 런던에 대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으로 알차게 채운 것 같아서 만족스럽다. 또한, 내셔널 갤러리에서 소장 및 전시 중인 작품들이 알차서 방문 자체만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작품 감상 도중 한 런더너와 나누었던 뜻밖의 대화로 인해 내셔널갤러리는 내게 재미있는 기억 하나를 선명하게 남겨준 곳이 되었다.

내셔널 갤러리의 내부 모습.
보고 싶었던 엘그레코의 그림을 비롯하여 틴토레토, 티치아노의 그림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조금의 휴식도 취하지 아니하고 숨 가쁘게 하루를 달려온 사람이 저녁 일정으로써 소화하기에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고된 세 시간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저녁식사를 하고자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채링크로스로드를 헤맸다. 딱히 먹고 싶은 것은 없고 몹시 피곤하여 커피와 샌드위치 따위의 것을 먹으며 앉아서 쉴 요량이었으나, 해가 저문 후의 런던의 번화가에서는 커피 마실 수 있는 곳을 찾기 힘들었다. 그나마 문을 연 카페에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 내가 앉을 곳이 없었고, 거리는 카페인이 아닌 알코올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추위에 떨며 거리를 헤매던 중 고든램지버거로도 알려져 있는 ‘스트릿버거’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간판을 보니 갑자기 햄버거가 먹고 싶어져 홀린 듯 스르륵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다행히 시끌벅적하지 않고 적당히 소란스러우며 적당히 따스한, 연말다운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다. 다정한 미소를 띤 친절한 서버에게 (잘 기억이 안 나지만)헬스키친 버거 세트와 맥주 한 병을 주문하고는 소파 위에 추욱 몸을 늘어뜨렸다. 음식이 나오기까지 너무 오래 걸려서 내 주문이 제대로 들어간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수시로 내게 찾아와 안부를 물어주고(?) 음식이 곧 나올 거라며 안심을 시켜주는 서버 덕에 언젠가 음식이 나오겠거니 생각하며 기다렸다.


이윽고 맨들맨들 윤이 나는 통통한 번으로 덮인 햄버거와 노릇노릇하게 잘 튀겨진 감자튀김이 사각트레이에 놓인 채 등장했다. 통통한 번 아래로 한눈에 봐도 제법 두툼한 고기패티와 싱싱한 양상추가 그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당당히 드러냈다. 그리고 많은 양의 육즙을 머금고 있을 것만 같은 그 패티 위로 은은한 연녹색 빛깔의 녹은 치즈가 마치 건물의 외벽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처럼 그 세력을 뻗쳐 나가고 있었다. 감자튀김은 먹기 좋은 적당한 두께로 잘린 채 어디 한 군데 못난 곳 없이 일정하게 노릇노릇한 빛깔로 잘 튀겨져 고소한 기름 냄새를 한껏 풍겼다. 햄버거를 그다지 즐기지도 않고 감자튀김은 더더욱 잘 먹지 않는 편이지만 지금 눈앞에 놓인 이 햄버거와 감자튀김의 모습은 마치 나를 지금껏 햄버거만을 갈망하며 살아온 사람처럼 만들기에 충분했다. 입이 작은 나는 칼로 햄버거를 갈랐다. 반으로 가르니 햄버거 안에 숨어있던 토마토와 피클이 패티 아래에서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먹기 좋게 자른 햄버거를 드디어 입 안에 넣었다.

음……

피곤해서 미각이 둔화되었나.. 햄버거의 맛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맛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엄청 맛있지도 않았다. 육즙을 가득 머금고 있을 것 같아 보였던 고기패티는 퍽퍽한 편에 가까웠다. 감자튀김 또한 그 맛이 평범했다. 내가 맥주를 별로 안 좋아하긴 하지만 어쨌든 맥주 맛 또한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평범하지 않은 것은 가격뿐이었다.


햄버거와 맥주로 저녁식사를 하고 5만 원을 지불한 후 다시 추운 밤거리로 나왔다. 런던 번화가의 밤거리는 한국만큼 활발하여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하는데, 음주와 술자리 모두 즐기지 않는 나에게 이 밤의 번화가는 따분하고 번잡하기만 한 곳이었다. 다시 템즈강변으로 가서 형형색색 조명이 켜진 밤의 런던아이도 한 번 스윽 보고 근처 서점도 들른 뒤, 아직 숙소에 들어가기에는 조금 아쉬운 시간이었지만 이곳에 더 있어봤자 할 것도 없을 듯하여 이만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스트릿버거에서 내가 주문한 것들.
런던아이와 템즈강의 야경.


앞서 이야기하였듯, 런던에 대해 이해하고 애정을 채우는 시간들로 첫날을 알차게 보낸 것 같아 매우 만족스러운 하루다. 런던은 가히 예술과 문화의 도시라고 불러도 될 만큼 누구나 쉽게 양질의 예술을 누릴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고, 그들의 전통과 문화가 놀랍도록 잘 보존되어 이어지고 있다. 또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친절하고 공손하여 언제 어디서든 기분 상할 일이 전혀 없었다. 늘 존중받고 배려받고 환영받는다고 느껴지도록 했다.


첫인상이 참 좋은 런던. 남은 며칠간 런던이라는 아이에 대해서 더욱더 알아가며 흥미롭고 다채로운 경험들을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두근두근 설렌다.

내일 또 봐요 런던.




*Gordon Ramsay Burger(고든램지 버거) : 영국의 유명한 셰프 Gordon Ramsay(고든램지)의 레스토랑 중 하나로, 햄버거 메뉴를 고급화한 햄버거 전문점이다.


*Street Burger : 이 또한 고든램지의 햄버거 전문점으로, 기존의 고든램지버거보다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으로 즐길 수 있도록 메뉴를 내놓았다.


트라팔가 광장과 내셔널갤러리.

*The National Gallery (영국 국립 미술관) :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시(市)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영국 최대 미술관 중 하나로, 1824년 창립되었으며 1838년 현재의 트라팔가 광장 위치로 이전한 바 있다. 13세기 중반부터 1900년까지 아우르는 약 2,300여 점 이상의 각국 회화 명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공식 웹사이트 링크 : www.nationalgallery.org.u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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