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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Feb 24. 2024

[9] 해리포터 덕후의 호그와트행 노정기

런던여행기_해리포터 스튜디오



토돗, 토도돗, 토돗,...

푸근한 이불속에서 정신 위에 드리워진 채 아직 떠나지 않은 잠의 빛깔로 몽롱한 가운데, 나무 창틀을 간지럽히듯이 은근하게 때리는 빗방울의 자그맣고 귀여운 소리가 잠의 빛깔을 걷어내며, 몽롱함을 자근자근 밟으며, 서서히 내 의식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살결에 축 내려앉은 공기는 왠지 촉촉한 느낌이 든다. 비가 오는가 보다.


시계를 보니 일어날 시간이다. 아직 울리지 않은 알람을 해제하고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드디어 내가 가장 기대하던 해리포터 스튜디오에 가는 날이다.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고, (화장은 언제나 귀찮지만 그래도 예쁜 사진을 남겨야 하니) 곱게 화장도 하고, Sorting Hat이 배정해 준 나의 기숙사 래번클로 교복까지 말쑥하게 차려입었다. 곧 서른을 앞둔 처지에 교복을 차려입은 나 자신이 주책맞은 것 같아 조금 민망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괜히 설레고 기분 좋았다.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했듯, 사실 기숙사 테스트를 처음 받고 슬리데린이 나왔었다. 하지만 나는 래번클로를 더 좋아하기에 다시 테스트를 받았고 원하던 결과가 나왔다.


유스턴(Euston) 역에서 왓포드정션(Watford Junction) 역으로 가기 위한 열차를 탔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런던의 철길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금세 왓포드정션 역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역사 내 커피숍에서 따뜻한 카페라테 한 잔을 사 들고 밖으로 나와 스튜디오행 셔틀버스를 기다렸다.


열차 타고 왓포드정션 역에 도착했다. 역에서부터 이미 해리포터 잔치다. 역사 내 코스타커피에서 카페라테를 샀다.


셔틀버스 정류장에는 해리포터 스튜디오로 가기 위한 팬들로 가득했다. 어린아이부터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모두 어린아이처럼 달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 또한 그러했고.

두 뺨 위에 분홍빛 설렘을 가득 띄운, 사람들의 즐거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아침 비가 내리고 난 후라 쌀쌀한 가운데 언제 올지 모르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며 약간 무료해진 나는 내 앞에 선 일가족에게 말을 걸었다.


(나) “우리 꽤 오래 기다린 것 같아요. 하하. 버스가 언제 오는지 아세요?”


(여자) “그건 우리도 잘 모르겠어요. 기다린 지 한참 됐으니 이제 곧 올 것 같아요.”


(나) “가족들 모두가 함께 해리포터를 좋아하나요? 멋진데요.”


(여자) “솔직히 말하면 (남편을 가리키며) 이이는 해리포터 팬은 아닌데 우리를 위해서 같이 와 준 거예요. 해리포터는 나랑 우리 아들이 좋아해요.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해요.”


그녀의 남편은 실제로 이곳에서 유일하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일랜드에서 온 해덕*인 그녀와 한국에서 온 해덕인 나는 해리포터와 관련된 가벼운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이렇게 한 마음 한 뜻으로 덕심을 나눌 수 있다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었다. 

*해덕 : 해리포터 덕후의 줄임말.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에메랄드색 이층 버스가 우리 앞에 다가와 섰다. 당연하게도(?)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전망 좋은 앞자리에 앉았다. 버스에서는 해리포터 영화 OST와 함께 콘셉트에 충실한 버스기사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 순간의 나는 진짜 호그와트행 버스를 타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터질 듯 설렜다.


버스는 만석이었고 내 옆자리엔 한 젊은 동양인 여자가 앉았다. 안 그래도 혼자 스튜디오 투어를 즐겨야 하는 처지가 내심 아쉬웠던 차에 나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그녀가 왠지 반갑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툭 건넸다.


“Hi.”


“Hi.”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그녀는 두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며 화답했다.


싱가포르에서 여행을 온 대학생이라는 그녀. 알고 보니 놀랍게도 그녀는 한국인이었다. 인연이란 것이 이렇게나 신기하다! 이곳에서 우연히 한국인을 만날 줄이야. 그녀와 나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그것도 덕친!


그녀와 함께 해리포터와 관련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나누며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머나먼 타국에서 친구를 사귀게 된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인데 함께 덕심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났으니 이 모든 상황이 마치 마법처럼 기묘하고도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야말로 9와 4분의 3 승강장을 통해 진짜 마법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셔틀버스를 타고 도착한 WB 스튜디오 런던. 초입에서 사진도 찍었다.



*WB 해리포터 스튜디오 이야기는 다음 화에 더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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